장희준기자
[아시아경제 장희준 기자] 세계 2대 핵보유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의 핵통제 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흔들렸던 강대국 간 핵전력 군축의 기조가 다시 바로 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1년 넘게 서로를 등진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 테이블이 무너지게 되면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대만까지 '핵전력 강화 경쟁'에 휘말릴 우려가 크다. 이를 명분으로 북한까지 핵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양국의 협상 재개는 역내 안정을 위해서도 고무적인 신호로 평가된다.
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언론 브리핑에서 뉴스타트 협정 관련 사항을 다루는 양자협의위원회(BCC)가 조만간 소집될 것이라면서, 미·러 양국이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BCC는 당초 연 2회 소집되지만, 지난해 10월을 끝으로 1년 넘게 일정이 잡히지 못하는 상태였다.
뉴스타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냉전시대의 끝자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과거 미국과 옛 소련은 1991년 7월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감축에 합의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한 바 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0년 4월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새로운 포괄 핵무기 감축 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스타트의 맥을 이어가는 협정이라는 취지에서 '뉴스타트'라고 명명한다.
2011년 2월 발효된 이 협정은 미·러 양국이 실전에 배치되는 핵탄두 수를 1550개 이하로 줄이고, 핵탄두를 운반하는 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 등을 700기 이하로 줄이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협정은 10년 기한으로 체결됐고 양국이 합의할 경우 5년간 연장된다는 조항을 달았다. 미국과 러시아는 협정 기한 종료를 앞둔 지난해 2월 뉴스타트를 5년 연장하는 데 가까스로 합의했지만, 연장 조약에서 러시아의 신무기 억제 등은 빠졌다. 특히 세계 3위 핵보유국인 중국을 협상에 참여시키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양국이 핵군축을 놓고 갈라선 배경의 명시적인 발단은 올 2월부터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당초 미국과 러시아는 뉴스타트 협정에 따라 주기적으로 상대국의 핵무기 관련 시설을 사찰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2020년 3월부터 관련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바 있다.
이어 올해 8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러시아에 뉴스타트 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핵무기 통제 협상을 전격 제안했다. 협상 테이블에 중국까지 앉혀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핵무기 관련 시설의 사찰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새로운 핵무기 감축 합의를 위한 협상에 나설 용의는 있지만,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이 불쾌하다는 게 러시아 당국이 내놓은 입장이었다. 당시 러시아가 불만을 터뜨린 배경에는 우크라 침공에 따른 제재로 러시아 항공기가 미국과 유럽의 영공에 대해 통과 거부를 당하는 상황이 있었다.
우크라 침공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더티밤(dirty bomb)을 쓰려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더티밤은 재래식 폭탄에 핵 물질을 조합한 폭탄으로, 핵폭탄에 비해 위력은 약하지만 광범위한 방사능 오염을 일으킬 수 있는 비인도적 무기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미국에 대규모 핵전쟁 훈련인 '그롬(Grom)'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했고, 지난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참관하에 정례 핵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러 국방부는 이스칸데르 전술 탄도미사일과 극초음속 미사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발사 장면까지 공개하며 사실상 무력 시위를 벌였다.
연례적 훈련이라지만 일각에선 러시아가 이 훈련을 핵무기 이동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두 강대국의 관계가 급속도로 경색되면서 뉴스타트의 추가 연장 여부까지 불투명하다는 전망에 힘이 실렸고,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더티밤 사용'이라는 거짓말로 핵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만드는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핵무기를 쓸 생각이 없다"고 밝히면서도, 꾸준히 핵무기를 과시하면서 핵전쟁과 3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 등을 거론해 왔다. 이를 두고 바이든 대통령도 신경전을 벌이면서 러시아가 어떤 형태로든 핵무기를 사용하면 '재앙적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강대국 간 핵전력 군축의 기조가 흔들리게 되면 범세계적 차원의 핵무기 비확산 체제가 위협받게 된다. 미국과 러시아, 혹은 중국까지 기존의 핵군축 협정을 폐기하고 핵전력 강화에 뛰어들게 되면 비핵국가의 핵무기 보유 시도를 억제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무적인 점은 최근 물밑에서 러시아 정부와 접촉해온 것으로 알려진 미국이 공식적으로 뉴스타트 협상 재개를 선포했다는 점이다. 현지 언론에선 우크라 전쟁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핵 위협과 별개로, 러시아 정부가 핵통제 조약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을 미 당국에서 긍정적인 변화로 인식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넘어야 할 산도 분명하다. 러시아는 뉴스타트 협정의 재연장을 논의할 의향을 드러내고 있지만, 미국은 핵무기 관련 시설에 대한 현장 사찰이 재개되는 걸 협상의 전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재차 러시아가 항공기의 영공 통과 거부를 풀라는 조건을 걸 공산이 크다. 양국이 어떤 조건으로 협상을 전개해 나갈지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구체적인 회의 날짜와 장소는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그간 회의장소로 쓰인 스위스를 러시아가 더는 중립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는 만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다음 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