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희기자
[아시아경제 이서희 기자] "바위를 들어 옮겼는데 벌타가 아니라고요?"
윤이나 선수의 ‘오구 플레이’ 사건을 계기로 골프장 내 ‘반칙 규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골프 규칙을 관할하는 영국왕립골프협회(R&A)에 따르면 골프 규칙은 세부 조항이 100개에 달할 정도로 많고 복잡하다. 이 때문에 아마추어 골퍼는 물론 프로 선수조차 반칙 규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 시합에 나서 낭패를 보기도 한다. 때로는 규정을 잘 활용해서 위기를 탈출하는 선수들도 많다. 골퍼를 웃고 울리는 골프 규칙, 이 가운데 놓치기 쉬운 반칙 규정 몇 가지를 소개한다.
7월 경기도 이천 H1 클럽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호반 서울신문 위민스 클래식 1라운드. 데뷔 첫해인 지난해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 우승을 거머쥐며 신인왕까지 차지했던 송가은(22)은 보디 2개와 버디 1개로 1오버파 73타를 치며 선방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 받아들인 결과는 ‘실격’. 사유는 ‘장비 부정 사용’이었다.
문제는 송가은이 경기 도중 사용한 '거리 측정기'였다. KLPGA는 올 시즌부터 경기 중에 거리 측정기 사용을 허용했다. 단 거리나 방향에 관한 정보를 얻는 용도로만 기계를 사용하도록 했다. 고저 차에 따른 실거리 측정(슬로프)기능이 탑재된 거리 측정기는 사용할 수 없다.
이날 송가은은 슬로프 기능이 탑재된 거리 측정기를 고도 측정 기능을 끈 채 사용했지만, 경기 후 해당 사실을 경기 위원장에 자진 신고해 실격 처리됐다. KLPGA 규정에 따르면, 고도 측정 기능을 실행하지 않더라도 기능이 탑재된 거리 측정기를 사용했다면 규정 위반이다. 송가은은 경기가 마친 뒤 “매니지먼트 측에서 경기 위원회에 문의했을 땐 (고도 측정 기능이 탑재된 거리 측정기를) 사용해도 된다고 들었다. 커뮤니케이션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규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 밝혔다.
장비 부정 사용으로 황당하게 대회장을 떠나야 했던 선수는 또 있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활약하는 안선주는 2013년 일본 지바현 소데가우라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니치 레이디스 2라운드에서 하우스 캐디의 장비 부정 사용으로 실격됐다. 안선주가 5번 홀에서 두 번째 샷을 하기 직전 하우스 캐디가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한 '나침반'이 화근이었다.
일본 프로 골프 규칙 14조 3항에는 플레이어는 라운드 도중 바람의 방향이나 잔디 결의 방향을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나침반을 사용할 수 없다고 명시돼있다. 하우스 캐디를 제공한 경기장 측은 이러한 규정을 사전에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다. 캐디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안선주는 대회 이틀째 날 경기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도치 않게 ‘라이 개선 위반’으로 벌타를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 7월 강원도 평창군 용평의 버치힐 골프클럽에서 열린 KLPGA 투어 맥콜 모나파크 오픈 최종 3라운드에서 박결(26)이 15번 홀(파4)에서 세 번째 샷으로 날린 공이 하필이면 벙커의 가파른 턱 앞에 박혔다. 샷 자세를 잡기 위해 벙커 안으로 들여놓은 오른발이 부드러운 모래와 함께 자꾸만 미끄러지는 상황. 박결은 발로 여러 차례 모래를 다진 뒤 자세를 잡고 샷을 했다. 결과는 ‘2벌타’였다. 박결은 15번 홀에서만 ‘퀀튜플 보기’(5오버파)를 범해 우승 경쟁에서 탈락했다.
R&A 골프 규칙 8.1A 6에 따르면 플레이어는 스탠스를 만들기 위해 지면을 변경해선 안 된다. 골프가 자연과 함께 진행되는 스포츠인만큼 플레이어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스윙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채가 나뭇가지나 덤불 등에 걸리는 것은 규정 위반으로 치지 않는다. 이때도 연습 스윙을 하는 척 지형을 건드리는 행위는 반칙으로 인정돼 벌타를 받는다.
연습 스윙 과정에서의 행위를 제한적으로 허용한 골프 규정을 악용했다 낭패를 본 골퍼도 있다. ‘필드 위의 악동’이라 불리는 미국의 패트릭 리드(32)가 대표적이다.
패트릭 리드는 2019년 히어로 월드 챔피언십에서 연습 스윙을 하는 척 웨이스트 에어리어(주로 모래로 채워져 있으나 벙커가 아니라 일반구역으로 규정된 지역)에 있는 공 뒤에 있는 모래를 두 차례나 걷어냈다가 라이 개선으로 2벌타를 받았다. 반칙 의혹이 일자 리드는 카메라 각도에 의한 것이라며 항변했지만, 중계 화면엔 그가 백스윙하는 척 모래를 걷어내는 장면이 또렷이 담겨있었다. 이로 인해 리드는 오랜 시간 ‘양심 불량’이라는 오명까지 썼다.
반면 경기 규칙을 잘 활용한 사례도 있다. 1999년 PGA 투어 피닉스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벌어진 타이거 우즈의 전설적인 ‘루스 임페디먼트(loose impediment)' 사건이다.
타이거 우즈가 13번 홀에서 티샷한 공이 300야드 넘게 날아가 사막 모래밭 커다란 바위 앞에 떨어졌다. 바위가 공을 가리는 탓에 언플레이어블 볼을 선언해야 할 상황. 하지만 우즈의 판단은 달랐다. 이 바위를 ‘루스 임페디먼트’라고 주장한 것이다. 루스 임페디먼트란, 나뭇가지·나뭇잎·작은 돌·동물의 배설물 등 땅에 박혀있지 않은 코스 내 장애물을 말한다. 골프 규칙에 따르면, 선수는 경기에 방해가 되는 루스 임페디먼트를 제거할 수 있다.
경기위원이 우즈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갤러리 수십 명이 달려와 거대한 바위를 함께 들어 옮겼다. 이는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던 우즈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명장면이자, 골프 규칙을 제대로 숙지하는 일이 선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골프는 유일하게 심판 없이 진행되는 스포츠인 만큼 선수의 양심과 투명성이 중요한 스포츠다. 플레이어는 동료 선수와 캐디에게 플레이할 공과 드롭 위치 등을 계속해서 알리고 보여줘야 한다.
투명성이 중요한 골프에서 동료 플레이어에게 '말 한마디'를 하지 않은 게 화근이 돼 대회 3연패를 놓친 사례도 있다. 지난해 8월, 대회 3연패와 시즌 7승에 도전하던 박민지(24)는 경기도 포천 대유몽베르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KLPGA 투어 대유위니아 MBN 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동료 플레이어에게 '프로비저널 볼' 선언을 하지 않아 4벌타를 받았다.
발단은 박민지가 6번 홀(파5)에서 친 공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면서였다. 공이 분실됐다고 판단한 박민지는 분실된 공에 대한 1벌타를 받는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공을 놓고 다시 쳤다. 그러면 이때부터 새롭게 드롭한 공이 인플레이 볼이 된다. 박민지가 동료 플레이어에게 “프로비저널 볼 하겠다”란 말을 하지 않았기에 원래 치던 공은 OB 밖으로 나가든 안 나가든 ‘아웃’이다(1벌타).
그러나 박민지가 처음 친 공은 예상과 달리 나무를 맞고 샷이 가능한 위치에 굴러와 있었다. 이를 발견한 캐디는 공을 찾아왔고, 박민지는 캐디가 찾아온 원래 공을 다시 쳤다(오구 2벌타). 이어서 박민지는 그린으로 걸어가면서 이제는 필요 없어졌다고 여긴 두 번째 공을 집어 들었다(1벌타). 이렇게 6번 홀에서만 총 4벌타를 받게 된 박민지는 대회 3연패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컷 탈락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