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남의 이름 빌려서 산 땅 20년 점유해도 시효취득 못해'

"계약명의신탁 신탁자의 점유는 소유 의사 없는 타주점유"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남의 이름을 빌려서 부동산을 취득한 사람은 20년간 부동산을 점유하더라도 부동산 소유권을 시효취득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당사자간 약정에 따라 부동산을 매수하며 명의수탁자 명의로 등기를 이전하는 계약명의신탁이 이뤄진 경우 명의신탁자의 부동산 점유는 애초부터 법률상 부동산 소유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점유이기 때문에 부동산 시효취득에 필요한 자주점유(自主占有)로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숨진 A씨의 유가족이 B씨 등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8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판결에는 계약명의신탁과 부동산 점유취득시효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A씨는 1978년 사망한 부친으로부터 토지를 상속받아 소유권을 취득했다. A씨는 상속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1997년 2월 24일 토지를 한국농어촌공사(이하 공사)에 매도하고 등기도 이전했다.

A씨는 비슷한 시기 B씨와 명의신탁 약정을 했다. 실제로는 A씨가 공사로부터 토지를 매수하지만 계약당사자(매수인)로 B씨가 나서고 소유권이전등기 역시 B씨 명의로 하는 이른바 '계약명의신탁' 약정이었다.

부동산실명법 제4조(명의신탁약정의 효력) 1항은 '명의신탁약정은 무효로 한다'고 규정, 모든 형태의 명의신탁약정의 효력을 무효로 정하고 있다.

또 같은 조 2항 본문은 '명의신탁약정에 따른 등기로 이루어진 부동산에 관한 물권변동은 무효로 한다'고 규정, 당사자간의 명의신탁 약정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이뤄진 등기의 효력 역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법 제4조 2항 단서는 '다만, 부동산에 관한 물권을 취득하기 위한 계약에서 명의수탁자가 어느 한쪽 당사자가 되고 상대방 당사자는 명의신탁약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 이번 사안과 같이 명의수탁자(B씨)가 부동산 매매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되고 상대방(공사)이 그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 예외적으로 등기로 이뤄진 부동산 물권변동(소유권 이전)을 유효로 취급하는 예외를 뒀다. 즉 계약명의신탁에서 부동산을 명의수탁자에게 매도한 상대방이 명의신탁약정 사실을 모르는 선의일 경우 명의수탁자 명의의 등기가 유효로 인정받게 된다.

이번 사안의 경우 비록 A씨가 실제로는 자신이 토지를 구입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B씨를 내세워 공사와 매매계약을 체결하게 하고 등기도 B씨 명의로 이전했지만, 공사가 A씨와 B씨 사이의 명의신탁 약정을 몰랐기 때문에 B씨 명의의 소유권이전등기가 유효한 등기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A씨는 B씨와 명의신탁 약정을 체결하면서 B씨가 자신의 명의로 돼 있는 토지에 근저당권을 설정해주고 자신의 명의로 공사로부터 대출을 받아 그 돈으로 일단 토지 매매대금을 지급한 뒤 A씨가 대출금을 모두 갚으면 B씨가 A씨에게 토지 소유권이전등기를 해주기로 하는 약정을 함께 체결했다.

이 같은 약정에 따라 B씨는 1997년 3월 4일 공사로부터 대출을 받아 토지를 매수했고, 같은 해 4월 18일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그리고 같은 날 대출금 채무를 담보하기 위해 공사 명의로 채권최고액을 9500여만원으로 하는 근저당권 설정등기도 마쳤다.

이후 A씨의 요청에 따라 B씨는 다시 C조합에게 2009년 1월 15일자 매매를 원인으로 하는 토지 소유권이전등기를 2009년 2월 6일 마쳤다.

한편 A씨는 1999년 12월 4일부터 2001년 11월 26일까지 B씨에게 7500여만원을 지급, 대출금 원금과 이자를 갚도록 했고, 2011년 4월 18일 남은 채무 잔액 1900여만원을 B씨의 명의로 공사에 직접 송금해 대출금 채무를 모두 갚았다. B씨 명의 토지에 설정돼 있던 공사의 근저당권설정등기는 2012년 3월 12일 말소됐다.

그런데 C조합은 D씨에게 토지를 명의신탁하기로 하고 2015년 5월 15일과 2017년 6월 29일 각각 토지의 44/183 지분과 139/183 지분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부동산을 공사로부터 실제 구입하고 매매대금을 부담한 사람은 A씨였지만 등기부상 소유자는 A씨의 부친에서 공사, B씨, C조합, D씨 등으로 순차적으로 바뀌었고, 부동산실명법에 따라 B씨 명의의 등기가 유효하게 인정되는 상황이었다.

A씨는 자신과의 약정을 어기고 부동산을 처분한 B씨를 배임과 사기 혐의로, 최종 부동산등기 명의자인 D씨를 B씨의 배임 공범으로 2017년 4월 형사고소하기도 했지만 사건을 수사한 광주지검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두 사람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A씨는 최종 등기 명의자인 D씨를 상대로 소유원이전등기를 말소해줄 것을, 그리고 명의신탁에 따라 등기를 넘겨받은 C조합에게는 부당이득 반환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를 해줄 것을 각각 주위적으로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예비적으로는 B씨와 C조합에 대해 자신이 부담한 토지 매매대금을 반환하라는 부당이득 반환을 청구했다.

A씨는 소송이 진행되던 중인 2018년 2월 8일 사망했고, A씨로부터 상속을 받은 A씨의 아내와 4명의 자녀가 소송을 이어받았다.

1심 재판부는 A씨 등의 주위적 청구, 즉 D씨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청구와 C조합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를 각하했다.

A씨 등은 명의신탁 약정에 따라 경료된 B씨 명의의 등기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B씨 명의의 등기가 무효가 되려면 A씨와 B씨, 공사 3자간 등기명의신탁이 돼야 하지만, 이번 사안의 경우 계약명의신탁이기 때문에 B씨 명의의 등기는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3자간 등기명의신탁은 명의신탁자인 A씨가 매도인(공사)과 직접 계약을 체결하면서 등기 명의를 명의수탁자인 B씨에게 이전하기로 하는 형태의 명의신탁이다. 세 사람이 명의신탁 사실을 모두 인지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계약과 등기 이전으로 이 경우에는 부동산실명법에 따라 A씨와 B씨간의 명의신탁 약정은 물론, 공사에서 B씨로의 등기 이전도 무효로 취급된다.

애초 B씨 명의로의 이전등기가 유효한 만큼 A씨에게는 소유권이전등기 말소나, 소유권이전등기를 청구할 권한이 없다는 결론이다.

다만 재판부는 A씨 등이 예비적으로 청구한 부당이득 반환 청구 중 명의수탁자 B씨에 대한 부분은 일부 인용했다.

유효한 토지소유권을 취득한 만큼 토지 매매대금 명목으로 A씨로부터 받은 5300여만원과 그동안의 법정이자는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2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A씨 등은 2심에서 주위적 청구취지를 점유취득시효 완성을 원인으로 하는 소유권이전등기 및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청구로 변경했는데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

민법 제245조(점유로 인한 부동산소유권의 취득기간) 1항은 '20년간 소유의 의사로 평온, 공연하게 부동산을 점유하는 자는 등기함으로써 그 소유권을 취득한다'고 정하고 있다.

부친으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취득한 A씨가 B씨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가 이뤄진 1997년 4월 18일부터 2018년 2월 8일까지 해당 토지를 계속 점유하면서 경작한 사실에 대해 당사자간 다툼이 없고, A씨가 소유의 의사를 갖고 평온·공연하게 토지를 점유했다는 점(자주점유)은 추정되므로 2017년 4월 18일 토지에 관한 점유취득시효가 완성됐다고 본 것.

재판부는 따라서 A씨 등은 취득시효가 완성될 당시 토지소유자였던 B씨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판단, B씨 이후의 등기 명의자들(C조합과 D씨)은 각 소유권이전등기를 말소하고, B씨는 A씨의 상속인들에게 각자의 상속분에 따른 지분이전등기를 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같은 2심 판단은 점유취득시효 완성을 위한 요건인 자주점유에 대한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점유자의 점유는 일응 소유의 의사로 점유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점유자가 점유개시 당시에 소유권취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법률행위 기타 법률요건이 없이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면서 타인 소유의 부동산을 무단점유한 것임이 증명됐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점유자는 타인의 소유권을 배척하고 점유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은 타주점유로 봐야 한다"며 종래 대법원 판결을 인용했다.

이어 재판부는 "계약명의신탁에서 명의신탁자는 부동산의 소유자가 명의신탁약정을 알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부동산의 소유권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매계약의 당사자도 아니어서 소유자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청구를 할 수 없고, 이는 명의신탁자도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명의신탁자가 명의신탁약정에 따라 부동산을 점유한다면 명의신탁자에게 점유할 다른 권원이 인정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명의신탁자는 소유권 취득의 원인이 되는 법률요건이 없이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면서 타인의 부동산을 점유한 것"이라며 "이러한 명의신탁자는 타인의 소유권을 배척하고 점유할 의사를 가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므로 소유의 의사로 점유한다는 추정은 깨어진다"고 밝혔다.

A씨가 애초 B씨를 내세워 공사와 매매계약을 체결한 것은 계약명의신탁에 해당돼 거래 상대방인 공사가 이 같은 A씨와 B씨 사이의 명의신탁 약정을 알지 못했을 때 부동산실명법상 B씨 명의의 등기가 유효하게 인정되는 만큼, A씨도 스스로 자신이 해당 토지의 소유권을 법률상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봐야 하고, 그렇다면 소유의 의사를 갖고 토지를 점유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피상속인인 A씨는 B씨와 이 사건 토지에 관한 계약명의신탁약정을 체결한 다음, B씨가 명의신탁약정을 모르는 한국농어촌공사로부터 이 사건 토지를 매수하고 1997년 4월 18일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고, A씨는 1997년 4월 18일부터 2018년 2월 8일까지 이 사건 토지를 계속 점유하면서 경작했다"며 "사실관계가 이와 같다면 A씨는 계약명의신탁의 명의신탁자로서 1997년 4월 18일 무렵 소유권 취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법률요건이 없이 그러한 사정을 잘 알면서 B씨 소유인 이 사건 토지를 점유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재판부는 "이로써 A씨가 이 사건 토지를 소유의 의사로 점유한 것이라는 추정은 깨어졌다"며 "A씨에게 다른 권원에 의해 이 사건 토지를 점유했다는 사정이 없는 한 A씨의 점유는 타주점유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데도 원심은 명의신탁약정은 당사자 사이에서 명의신탁자가 목적물의 소유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명의신탁자에게 소유의 의사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전제에서 A씨의 자주점유 추정은 깨어지지 않았고 이 사건 토지에 관한 점유취득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B씨에게 원고들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인정했다"며 "이러한 원심판결에는 계약명의신탁과 부동산 점유취득시효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계약명의신탁약정에 따라 부동산을 점유하는 명의신탁자의 점유는 자신이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사정을 명확히 알고 점유하는 것으로서 자주점유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점유취득시효 완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선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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