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주형기자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6·1 지방선거를 두달 앞둔 가운데, 국민의힘이 국내 최초로 출마자 기초자격평가 시험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시험을 통과한 인재만 공천 시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고득점자에게는 가산점도 붙게 될 예정이다. 시험 제도가 출마 후보자들의 역량을 증진하고 '시스템화된 공천'을 당에 뿌리 내리는 발판이 될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국힘 "기초자격 평가 통과해야 공천 심사대상"
지난 3일 김행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 대변인은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에서 "기초자격 평가를 통과한 인재만 공천 심사 대상으로 삼는 개혁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라며 "국민의힘 공직 후보자라면 일정 이상 역량과 소양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의힘 적격성 평가'(PPAT)로 알려진 이 시험은 앞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해 당대표 경선 당시 내걸었던 공약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 소속 공직 출마자들은 앞으로 PPAT에서 일정 이상 점수를 얻어야만 공천 심사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첫 PPAT는 오는 17일 시행 예정이며, 고사장은 추후 당 홈페이지에 공지된다. 6·1 지방선거 공천신청자 전원이 시험을 치러야 하며 광역의원 210만원, 기초의원 110만원의 전형료도 납부해야 한다.
이 대표는 지난 1일 PPAT 예상 문제 샘플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하기도 했다. 시험 문제는 당헌·당규부터 국민의힘 정책 내용 질의, 자료 해석 및 상황판단, 현안분석 등 공직자가 갖춰야 할 능력을 폭넓게 테스트한다.
특히 문제를 읽고 나름의 추리력을 동원해 해결해야 하는 자료해석 및 상황판단 예제는 5~7급 국가공무원시험에 도입된 'PSAT'과 유사하다. 고득점을 노리려면 시험 공부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최초 '필기시험' 공천…계파 갈등 해소할 수 있을까
공천 과정에 필기 시험이 도입되는 것은 국내 정치사상 이번이 최초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해 5월 당대표 경선 당시 기자회견 중 자격 시험을 통해 공천 과정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줄 세우기 계파 정치가 있어선 안 된다. 젊은 세대가 '극혐'한다"라며 "정치인들도 공부해야 되는 것이고, 당직자들도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공직 후보자 기초 자격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직 선거 출마자들의 공천 관리는 통상 공관위에서 담당한다. 그러나 공천권의 실질적인 행사는 언제나 정당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특정 정치인의 입김이 작용하는 계파 갈등은 당을 분열시키는 수준의 논란으로 격화하기도 했다.
당장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 새누리당 또한 각각 과거 당내 계파 갈등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지난 2007년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와 박근혜 후보 사이 계파 갈등 끝에 친이계가 정권을 잡자, 다음해 18대 총선에서 친박계 의원들을 대거 공천 탈락시킨 이른바 '친박 공천 학살'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정권을 잡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3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을 위해 '진실한 사람'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라고 언급하면서 새누리당 내에 '진박(진짜 친박)' 논란이 일었다.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자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진박계 중심 공천을 막겠다며 '옥새 파동'을 벌였고, 결국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제1당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게 넘겨주게 됐다.
이 대표는 한국 정당 공천 과정이 안고 있는 이같은 문제들을 자격 시험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기 시험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조건 하에 응시하는 데다, 시험 결과에 다른 누군가가 개입할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시험은 거짓말 안 해" vs "정치인이 공무원인가" 갑론을박
그러나 선거 출마자 필기시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이 대표가 PPAT 공약을 처음 공개했을 때도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는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험을 반영한다"라고 말했다. 지나친 능력주의의 문제를 지적한 마이클 샌델 미 하버드대 교수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인용한 언급이다.
자격시험 자체가 국민투표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재원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해 7월 한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에서 공천자격시험에 대해 "심각한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반대 의견"이라며 "시험제도 도입은 국민 주권주의의 대원칙과 맞지 않고, 설사 정당에서 공직후보자를 추천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PPAT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국민의힘 당원이라고 밝힌 20대 직장인 A씨는 "시험 점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공천 시스템보다도 훨씬 공정하고 투명하다고 본다"라며 "능력주의를 심화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그럼 나라를 좌우할 공직자를 뽑는데 당연히 능력이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회사원 B씨(38)는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공무원과 엄연히 다르다. 특히 지방의원들은 지역민의 불만을 청취하고 해결해주는 사람들 아닌가. 현장 돌아다니기에도 바쁜 사람들에게 책상에 앉아 공부하라는 게 말이 되나"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는 필기시험의 경우 장단점이 극명히 드러나는 제도이지만, 국내 정당의 '시스템 공천화'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PPAT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시험을 잘 치면 정치도 잘 하는가'라는 의문이 나오기 때문"이라며 "시험 과목이나 문항 내용 등에 대해서는 향후 (공직의 실정에 맞게) 재조정을 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당 정치에서 고질적인 문제였던 '밀실 공천'이 아닌, 후보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게 하는 '시스템 공천'의 단초가 될 수 있다"라며 "그동안 지방 선거는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이 공천권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모양새가 이어져 왔는데, (시험 제도는) 그런 양상을 배제하는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