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할 말을 잊어버렸는데….” 2000년 4월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열린 부산 명지시장 유세 현장.
부산 북구·강서구을 지역구에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유세 시작에 앞서 당 관계자들에게 난감한 심경을 토로했다.
정치인 노무현은 손꼽히는 대중 연설 능력자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능력은 어떤 정치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가, 할 말을 잊었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인 노무현은 부산 국회의원이 되고자 총선에 나왔지만 당시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명지시장 유세 현장에서 그의 연설을 들으려는 청중은 거의 없었다.
넓은 공터에 연설 무대를 마련했지만 청중은 보이지 않는 상황,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현장 상황을 이해하려면 1998년 7월21일 국회의원 재·보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서울 종로의 새로운 국회의원을 뽑았던 그 선거의 주인공은 정치인 노무현이었다. 그는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나왔는데,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종로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유력 대선주자의 부상에 여의도 정가는 술렁였다. 2000년 총선에서 종로 국회의원 재선에 성공한 뒤 2002년 대선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이어졌다. 그런데 종로 국회의원 노무현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종로의 품을 벗어나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 북구·강서구을 지역 국회의원에 도전한 것이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절대로 넘겨줄 수 없는 선거였다.
부산 북구·강서구을 선거는 혼탁하게 전개됐다. 노무현 후보를 떨어뜨리고자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색깔론 공세도 이어갔다. 노무현 후보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텅 빈 명지시장 공터 연설은 노무현 후보의 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제16대 총선 부산 북구·강서구을 지역구 개표 결과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는 4만464표(득표율 53.22%)를 얻어 여유 있게 당선됐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2만7136표(35.69%)를 얻는데 그쳤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노무현 후보의 총선 낙선은 반전의 시작이었다. 무모하게 느껴졌던 그의 도전에 여론이 움직였다. 지역구에서는 국회의원으로 뽑히지 못했지만, 전국적으로 그에 대한 응원의 물결이 이어졌다.
‘바보 노무현’에 대한 응원의 불씨가 빚어낸 나비효과다. 16대 총선으로부터 2년이 지난 이후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혔다.
정치인 노무현의 반전 드라마는 대통령을 꿈꾸는 여야 정치인들에게 꿈과 희망이다. 현재의 지지율은 낮지만 언젠가는 국민의 성원을 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2022년 대선을 넘어 2027년 대선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2022년 대선 레이스에서는 주요 정당의 후보가 되지 못했던 인물 중에서 차차기 대선(2027년)의 주인공이 탄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모멘텀’이다.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시대적 과제를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