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규의 야구라는 프리즘]학원 스포츠에서 '감독'이라는 말을 써야 할까

한국선 모든 스포츠서 쓰는 감독…번역은 日서 전래
정작 해당 말 탄생시킨 미국선 프로야구서만 제한적 사용
선수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에 어울리는지 의심

야구에서 감독은 중요한 자리다. 야구 규칙으로 봐도 그렇다. 첫 항목인 '야구의 정의(定義)'부터 '감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야구는 펜스로 둘러싸인 경기장에서 감독이 지휘하는 아홉 명(지명타자제의 경우 열 명)의 선수로 구성된 두 팀이 한 명 이상의 심판원의 주재 아래 이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기이다(야구 규칙 1.01)."

감독은 "경기장에서 자기 팀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그 팀을 대표하여 심판원 또는 상대 팀과 협의하도록 구단에서 지명된 사람(야구 규칙 2.50)"으로 정의된다. 야구는 19세기 미국에서 탄생한 스포츠다. 감독은 영어 '매니저(Manager)'의 번역어다. 감독 휘하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스태프는 코치(Coach)로 구분한다.

한국에서 감독이라는 명칭은 야구뿐 아니라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의 비슷한 지위에 적용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영화나 연극, 운동 경기 따위에서 일의 전체를 지휘하며 실질적으로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정작 미국에선 '매니저'가 예외적인 단어다. 미식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축구 등 야구를 제외한 주요 프로스포츠리그에선 감독을 '헤드코치(Head Coach)'라고 한다. 심지어 야구에서도 매니저는 프로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고교·대학 야구에서는 매니저가 아닌 헤드코치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감독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헤드코치'다. 경기 지휘뿐 아니라 선수단 운영 총책임을 맡는 감독을 헤드코치와 구분해 매니저라고 부르는 잉글랜드 축구 정도가 예외다.

4륜 마차에서 유래한 코치는 체력이나 기술을 가르친다는 뜻을 내포한다. 19세기 초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만들어진 단어다. 선수 기량을 일정 수준에서 다음으로 높이는 걸 마차 운행에 비유했다. 미식축구는 19세기 중반 미국 동부 대학에서 시작됐고, 농구는 1891년 개신교 청년단체인 YMCA에서 고안됐다. 그래서 코치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받아 들여졌다.

반면 야구는 미국 대도시 사교 클럽에서 시작됐다. 클럽은 성인 회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요구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코치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1845년 제정된 최초의 야구 규칙인 니커보커룰에는 '매니저'라는 단어가 없다. 대신 선수 가운데 한 명이 주장(Captain)으로 지명됐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 규칙을 만든 니커보커클럽 회원 가운데는 영국과 네덜란드 귀족 후예가 많았다. 직업도 금융인, 법률가, 건축가, 언론인 등 엘리트 계층이었다. 감정인으로 활동했던 회원 체스터 앨런 아서 주니어조차 귀족 혈통은 아니었으나 아버지가 21대 미국 대통령이었다. 야구는 점점 노동자의 스포츠로 성격이 변해갔다. 당대 노동계급에 만연했던 음주벽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를 우려한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장려했다. 작가 빌 브라이슨은 이 과정을 "육체노동자가 주식중개인보다는 체력과 지구력에서 크게 유리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유머러스하게 서술했다.

야구팀도 사교 클럽에서 관중을 모아 수입을 올리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그러자 선수들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책임이 커지게 됐다. 기업의 관리인인 매니저라는 직함이 야구단에 등장한 배경이다.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규율 확립이었다. 규율을 어긴 선수에게 벌금을 내리고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다.

권위 있는 '딕슨야구사전'에 따르면 매니저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야구 기사는 1876년에 처음 나타난다. 그해 현존 최고(最古)의 메이저리그인 내셔널리그는 첫 시즌을 치렀다. 내셔널리그는 선수협회(Association of Players)가 아닌 기업구단연맹체(League of Professional Baseball Clubs)라는 점에서 이전 리그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당시 채택된 내셔널리그 규칙에 '매니저'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전에 존재했던 리그 규칙에선 니커보커룰과 마찬가지로 '캡틴'이 지금의 감독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감독 겸 선수가 많았고, 구단주가 감독을 겸하기도 했다.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도 많았다. '코치'는 선수를 가르치는 자리고, '캡틴'은 기량이나 리더십이 가장 뛰어난 선수다. 하지만 관리자인 '매니저'는 상대적으로 선수 경험이 덜 중요했다. 이후 업무가 복잡해지자 경영 관련 업무는 비즈니스 매니저를 따로 둬 독립시켰다. 지금의 제너럴매니저(단장)다. 사장 아래, 회계·노무 담당 매니저 2인 체제로 운영됐던 남북전쟁 전후 미국 기업의 운영 방식을 따랐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감독(監督)'이라는 번역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게이오대학을 설립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1866~1870년 간행한 '서양사정'에서 '지도, 감시, 단속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고안했다. 후한서 순욱전에서 따온 단어다. '코치'보다는 '매니저'에 가깝다.

감독이라는 단어가 야구계에 도입된 건 그 뒤다. 스포츠 작가인 오시마 히로시는 "1920년대 도쿄 6대학리그에서 감독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에는 영어 단어인 매니저, 코치가 혼용됐다”고 전했다. 야구는 당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그래서 '매니저'의 번역어인 감독이 다른 종목에까지 통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코치를 교련(?練), 헤드코치를 주교련(主?練)으로 번역한다. 원뜻을 살피면 이쪽이 더 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일본 식민지 시대를 거친 한국에선 야구뿐 아니라 다른 종목 심지어 학원 스포츠에서도 감독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하지만 이질감이 있다. 감독, 즉 매니저는 미국의 기업 야구에서 비롯한 직함이다. 책임 있는 성인을 지휘하는 일을 한다. 학원 스포츠는 교육의 장이며, 학생 선수는 미래 직업운동선수 자원으로만 취급될 수 없다. '운동기계'를 양산해온 한국 학원 스포츠의 폐해는 스타 선수들의 잇따른 일탈로 여실히 드러났다. 학원 스포츠에서 과연 '감독'은 어울리는 단어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야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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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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