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기자
굴러온 돌이라고 해서 '온돌'이라 불렀다. 자꾸만 집으로 들어오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길고양이를 집으로 들였다. 가족들은 모두 제 자식인 양 온돌이를 아꼈다. 그렇게 3년을 함께 살아온 온돌이가 지난달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다같이 둘러 모여 온돌이와 쌓았던 추억을 하나 둘씩 꺼냈다. 온돌이의 마지막을 배웅해 준 이 가족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돼 있다. 직업도 변호사·의사부터 백수·영화 스텝·시민단체 활동가·일반 회사원까지 서로 다르다. 무슨 가족일까 싶지만 실제로 혈연으로도 법적으로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가족'이라 부른다. 1인가구 일곱명에 커플 셋 총 13명의 대가족은 '함께주택협동조합 2호점 무지개집'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무지개집 가족의 일원인 오김(40)씨는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아니지만 어쨌든 동거를 하고 있고, 때론 느슨하기도 하지만 가족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말했다. 20년 간 10번 이사를 다니다 이곳에 정착한 그는 "명절 때 밥 먹을 곳도 없고 외롭기도 하고 그런데, 그럴 때 같이 식사도 하고 시간도 보낼 수 있는 가족이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무지개집처럼 새로운 형태의 가족·주거 개념이 조금씩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다. 대개는 1인가구로 살아오다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혹은 필요에 의해 모여 살기로 한 경우가 많다. 주변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합류한 같은 성별의 커플도 있다. 민법상 가족에서 생겨 나오는 구속이나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혹은 멀어질 수밖에 없던 그런 사람들도.
단순한 '이웃'의 한계를 넘는 지점은 친밀함에서 나오는 소속감으로 대변된다. 조금 친한 이웃이란 규정은 이들이 느끼는 서로에 대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무지개집 식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이상'이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1인가구 혹은 커플이 각자의 방을 쓴다는 점에서 주거 형태는 '기숙사' 같다. 음식은 공동 공간에 모여 같이 만들고 같이 먹는다. 개인 시간을 제외하곤 가족처럼 어울리고 대화하며 산다. 서로의 '안전'에도 관심을 갖는다. 며칠 전엔 골목 안 어딘가에서 "살려 달라"는 외침이 들려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동네 사람 한 명을 살린 일도 있었다.
1인가구는 혼자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고독사'에 대한 불안 그리고 외로움을 나눌 상대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렇게 모여 공간·시간·정서를 함께 공유하는 관계가 바로 가족 아닐까.
무지개집과 비슷한 형태로 1인가구 6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아마니(별칭·33)씨는 "원룸에 혼자 살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생활에서 얻게 되는 안정감에 훨씬 더 만족한다"며 "부모님이랑 살았을 때에는 함께 있어도 힘든 점을 얘기할 수 없어 소통이란 게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서로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 고민도 나누고 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주거·생활 형태는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도 등장한다. 결혼과 출산 없이 연령이 서로 다른 여자 3명이 한 집에 모여 산다. 미라·무신·채현이다. 그들은 혈연으로 묶여 있지 않지만 그 어떤 혈연 가족들보다 서로를 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법적 지위는 '3인가구'일 뿐이다.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제도로부터 배제된다. 자신이 낳지 않은 전 남편의 아이 채현을 키우는 무신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도 없었을 테고, 미라가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무신이 동의서를 써줄 수는 자격도 없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이성애 중심의 혼인 혹은 혈연·입양으로 구성된 가족과 그들의 돌봄만이 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족'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법은 '가구'만을 계속 양산하는 셈이다.
1인가구가 급증하면서 이 같은 '혈연 관계 없는 생활 공동체'가 늘어날수록 이들을 수용하고 사회적 제도로 뒷받침 해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온다. 작가 김하나와 황선우가 쓴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1인가구 간 결합을 잘 보여준다. 3000부가 넘게 팔린 이 책은 동거라는 생활 방식 속 두 싱글 여성 이야기다. 이들은 1인가구를 원자에 비유하며 자신들을 '분자 가족'이라고 지칭한다. '여자와 남자라는 원자 둘의 단단한 결합만이 가족의 기본이던 시대는 가고 있다.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분자 가족이 태어날 것이다. 여자 둘, 고양이 넷. 지금의 분자 구조는 매우 안정적이다'라고 작가는 썼다. 우리나라 세 집 건너 한 집이 1인가구(29.3%)다.
"우리나라는 혈연으로 형성된 '정상가족'만 인정하고 있는데, 이 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분명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종걸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가족이 무엇이냐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법으로 규정하는 구성원의 모임을 넘어, 실질적인 가족 실천을 하는 이들도 가족 아니냐는 말로 요약된다. 가족 실천이란 가족을 형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돌봄·양육·부양 등 어떠한 실천을 하는 상태다. 가족구성권연구소는 호주제 폐지 이후 필요한 제도적 개선점을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로 여성학자·사회복지학자·성소수자인권단체·인권변호사 등이 함께 모여 활동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가족 실천만으로 가족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 연구위원은 한 동성애 커플을 예로 들었다. 파트너로 수십 년의 세월을 같이 한 또 다른 파트너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죽음을 맞았다. 이전까지 혈연 관계의 사람들은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사망 소식을 듣고 온 혈연 가족들은 장례 절차를 마쳤고 남은 파트너에게는 장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재산도 모두 가족이 가져갔다. 파트너가 실질적인 가족이었음에도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권리, 상속 받을 권리는 민법상 가족으로만 한정된다.
이 연구위원은 이성애 중심의 혼인제도가 1인가구 증가 시대에 여러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본다. 지난해 1인가구는 전체 가구의 29.3%(585만명)을 기록했다. 2인가구(27.3%·546만명), 3인가구(21.0%·420만명), 4인가구(17%·339만명)보다 많다. 이 연구위원은 "비혼인 상태에서도 재생산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출생은 사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차별 받고 있다"며 "어떤 형태의 가족을 만들 것인지 개인이 각자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이므로 정부가 일원화 해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실제 우리 주변에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공동체를 이뤄 사는 경우들이 있다. 공동주택에 함께 살 수도 있고 거주지는 달라도 가족처럼 자주 만나는 경우도 있다. 통계청은 혈연 관계가 없는 5인 이하가 함께 사는 가구를 '비친족가구'로 분류해 집계한다. 지난달 18일 발표된 장래가구추계를 살펴보면 비친족가구의 최근 증감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2017년 30만9000가구(2017년)로 2016년 대비 14.6% 늘었고 2016년엔 전년 대비 25.7%(5.2만명) 증가했다. 비친족가구는 2047년 37만가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연구위원은 "사회를 지탱할 인구가 꼭 혼인으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혼인제도는 누군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지만 누구는 아예 선택권조차 박탈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이라고 했다.
이러한 문제는 생활동반자법,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정상가족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사람의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해결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 연구위원은 "호주제가 폐지될 때 무슨 큰 일이 날 것처럼 보였지만 큰 변화 없이 대부분 살아가고 있다"며 "사회는 이미 변화하고 있는데 정부 정책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