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만찬/이경림

백만 번 죽었다가 백만 번 태어난 고양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저녁이 왔다

백만 번 죽었다가 백만 번 태어난 행운목이 시푸르게 서 있는 거실에

저녁이 지나가고 있다

엄마는 헝클어진 머리로 백만 번째 침상으로 들어가고

저녁이 깊다

백만 번 죽었다가 백만 번 태어난 어둠이 미친 듯 이글거린다

백만 번 죽었다가 백만 번 태어난 아침을 빼물고

애완견 슬기가 헐떡거린다

어디선가 민들레 같은 것이 깨진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노랗게 죽고 있으리라

백만 번 죽고 백만 번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때까치들이 깍깍거린다

백만 번 죽는 일은 백만 번 태어나는 일이라고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백만 번 태어나는 일은 백만 번 죽는 일이라고

한 청년이 담배를 꼬나물고 간다

어쩌다, 무엇 때문에, 백만 번이나 죽었는지

백만 번이나 태어났는지

백만 번 생각해도 모를 일

나는 다만 저녁의 마트에서

백만 번 죽은 브로콜리와 백만 번 태어난 콩나물과

백만 번 죽은 시금치와 백만 번 태어난 돼지고기와 고등어를

사 들고 와 백만 번째 식탁을 차릴 뿐

■백만 일은 2740년쯤 된다. 그 누구도 그만큼 오래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백만 번 죽은 브로콜리"도 있을 리 없고 "백만 번 태어난 돼지고기와 고등어"도 있을 리 만무하다. 모두 과장이다. 시뿐만 아니라 글에서 과장은 흔히 대상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하는 수사법이다. 이 시에서 "백만 번"은 생의 어떤 아득함을 부각하기 위해 쓰인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더듬어 읽는 것은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가. 그보다는 "백만 번째"라고 적혀 있으면 정말 "백만 번째"라고 여기고 읽는 건 어떨까. "백만 번째" 저녁이라…… 물론 워낙 큰 숫자라 당장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더욱 그 막막함이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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