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주기자
[아시아경제 이관주 기자] “경찰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남용돼서는 안 되며, 절제된 가운데 행사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 확인됐습니다. 원칙과 기준이 흔들리기도 했고 인권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부족했었습니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13층 대청마루.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보고회’에서 민갑룡 경찰청장이 머리를 숙였다. 민 청장은 과거 경찰의 법집행 과정에서 발생된 인권침해에 대해 사과하고 고통 받은 피해자와 그 가족,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유가족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했다.
경찰의 과거 반성에 이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여기에는 지난해 2월 발족한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의 역할이 컸다. 진상조사위는 1년6개월 가까운 활동기간에 10개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섰다. 이번 보고회를 끝으로 해단한 진상조사위의 권고사항 이행은 이제 경찰의 과제로 남게 됐다.
진상조사위는 법조계ㆍ시민단체를 비롯해 경찰조사관 등 20명으로 구성돼 지난해 2월6일 활동을 시작했다. 출범과 동시에 ▲용산참사 ▲평택 쌍용자동차 파업 ▲밀양 송전탑 건설 ▲제주 강정마을 ▲고(故) 백남기 농민 사건 등을 우선조사 사건으로 지정했다. 이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 시신탈취 ▲KBS 공권력 투입 ▲공익신고자 사건 등을 추가했다.
진상조사위는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의 면면을 밝혀내는 등 일정부분 성과를 거뒀다. 가장 최근에 나온 제주 강정마을 사건 조사 결과, 해군기지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해군이 방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 고 염호석씨 시신탈취 사건 당시 정보경찰이 삼성 측에 주요 정보를 건네주며 '대리인' 노릇을 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쌍용차 파업 사태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이었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보고라인을 무시한 채 직접 청와대로부터 진압작전 승인을 받아 실행에 옮겼다는 것도 새롭게 드러난 사실이다. 진상조사위는 단순히 사실관계만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찰청에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를 권고하며 실효성을 높였다. 경찰청은 진상조사위의 조사 결과 및 권고에 따라 쌍용차 가압류 대상자의 가압류를 전원 해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권고과제 35개 중 27개를 완료했다
경찰은 위원회의 권고를 존중해 집회시위 현장에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대화경찰관제(2018년10월), 안전진단팀(2019년3월) 운영 ▲살수차 원칙적 미배치 ▲헬기의 저공비행을 통한 해산 및 테이저건, 다목적발사기 사용을 금지했다.
또 ▲정보 활동의 범위 명확화 ▲통제시스템 마련 ▲인력 감축(11.3%) 등 정보경찰을 획기적으로 개혁하고, 경찰 법집행으로 심각한 인권 침해행위가 발생하면 권익위원회, 민간전문가 등과 합동으로 즉각적인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도록 제도화했다. 정보 경찰 개혁을 위한 법률 개정 등 미 완료 8개 과제도 금년 중 완료를 목표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경찰이 자행했던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에 한 발 다가갈 수 있었지만, 조사 범위의 한계로 인해 '윗선' 등 실체 규명에 실패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진상조사위가 법률이 아닌 '경찰청 훈령'에 근거한 탓이다. 훈령에 조사협조 의무 조항을 규정해 현직 경찰관 조사는 수월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엔 조사 협조를 받기가 어려웠다. 유남영 진상조사위 위원장(변호사)은 "전직 경찰관이나 타 부처의 경우 자발적 협조가 없으면 조사가 불가능했다"고 아쉬워했다.
이런 한계 때문에 결국 각종 사건에서 '윗선'의 개입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문건 등을 바탕으로 청와대 등의 하명ㆍ지시가 있었던 점은 유추할 수 있었지만 이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상조사위가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밝힌 이유이기도 하다.
진상조사위의 권고가 또 다른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기도 했다. 용산참사ㆍ쌍용차 사태 등과 관련해 경찰이 제기한 국가손해배상소송을 모두 취하하라고 진상조사위가 권고한 데 대해, 현직 경감이 경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펼치는 등 일선 경찰관들의 반발도 이어졌다. 경찰 내부에서는 불법 집회·시위에 대한 지적은 없이 경찰 대응만을 문제 삼았다는 불만과 함께 공권력 행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결국 국가손배 철회 관련 사안은 경찰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평택 쌍용차 파업 당시 경찰이 본 인적·물적 피해와 관련해 쌍용차 노조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현재 대법원에 올라간 상태다. 민 청장은 "대법원 계류 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한다"며 "대법원 판단 취지에 따라 경찰에서 필요한 조치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와 관련해 주최 측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경우 최근 법원의 화해 권고 결정이 내려졌다. 법원은 당초 경찰이 청구한 손해배상 금액의 절반가량인 약 1억9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화해 권고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의 공식 사과에 대해 강정마을해군기지반대주민회, 금속노조삼성전자서비스지회 등으로 구성된 경찰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단체는 성명을 내고 경찰청장의 사과를 환영했다.
피해자단체는 "어제 30여명의 피해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사과하고 피해자들에게 권고 이행 계획을 설명하고 의견을 청취한 데 이어 이뤄진 대국민 공식 사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다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취하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유감을 표했다. 이들은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가압류는 권고대로 해제를 완료했고 전향적인 검토를 언급한 것은 그나마 진전된 입장"이라며 "그러나 24억원에 이르는 손배소 철회에 대해서는 대법원 계류 중이라는 이유로 권고 이행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지적했다.
이관주 기자 leekj5@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