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늘]국부마취를 당하고

허진석 부국장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1969년에 '국부마취를 당하고'를 발표했다. '양철북'(1959)이후 10년 만에 나온 이 작품은 '훗날 소심한 개량주의자로 변신한 젊은 혁명가의 소아적 호전성을 주제로 다룬' 소설로 이해된다.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다. 그라스는 소설을 계획과 논쟁 따위로 채웠다. 셰르바움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네이팜 탄으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데 대한 항의로 반려견을 베를린 중심가에서 불태우려 한다. 여러 인물이 이 계획을 놓고 논쟁한다. 이야기는 셰르바움의 선생인 슈타루쉬가 치과수술을 받으며 의사와 나누는 대화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는 찬사를, 독일에서는 비판을 받았다. ‘국부마취를 당하고’가 영어로 번역돼 나온 1970년 '뉴욕 타임즈'는 "그라스는 자유주의자의 운명을 어렵게 만드는 저 무능력과 매저키즘과 절망적인 수단들을 가차없이 조소한다"고 썼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자의적으로 끼워맞춘" "작은 산문쪼가리들의 혼합"이라거나 "그라스의 작품이라고 믿지 못하겠다"는 혹평을 들었다. 좌파 평론가들은 그라스가 '68혁명'의 의미와 성격을 축소ㆍ왜곡했다고 힐난했다.

68혁명은 1968년 오늘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파리 낭테르 대학이 학생들과 대립하며 학교를 폐쇄하자 소르본 대학의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여 광장으로 진출했다. 파리 학생,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은 6월 들어 베를린과 로마로 확산됐다. 더 멀리는 일본과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68혁명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이끌어 냈다. 프랑스에서는 평등, 성해방, 인권, 공동체주의, 생태주의 등 진보적 가치가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 보수적인 가치들을 대체했다. 프랑스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이 혁명이 지금의 프랑스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평가했다.

독문학자 김누리는 2000년 9월 독어독문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변증법적 알레고리 소설의 가능성'에서 ‘국부마취를 당하고’를 천착한다. 그는 "기존의 비평들이 이 소설의 변증법적 인물구성과 알레고리 미학을 충분히 천착ㆍ규명하지 못한 결과 이 작품에 내장된 미학적 장치와 내재된 정치적 함의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국부마취를 당하고’는 그라스가 전후 독일 사회의 문제를 소재로 쓴 최초의 소설이다. 김누리는 하인츠 루드비히 아놀트를 인용한다. "우리의 현시대와 나란히 설정된 최초의 책이자 평화의 문제들과 씨름한 최초의 시도이다.“

그라스가 말하는 '현재의 문제', '평화의 문제'는 무엇인가. 1960년대 후반 독일의 지식인들의 현안은 68혁명의 쟁점들이었다. 그들의 고뇌는 '폭력의 도덕적 정당성'과 '혁명이냐 개혁이냐'하는 변화전략의 문제로 집약됐다. ‘국부마취를 당하고’도 이러한 문제의식 언저리에 놓인다. 김누리는 이 소설을 68혁명을 다룬 진지한 문학적 탐구로 받아들인다. 그에게 이 소설은 "모순적인 딜레마의 상황 속에서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찾으려는 한 인물이 앓던 시대적 '통증'의 기록이고, 좌파지식인 내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입장들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을 모색한 한 지식인의 변증법적 사유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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