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영화 '사일런스' 스틸 컷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는 이 설명을 구체화한다. 메이지유신 전후의 일본 상황을 심층적으로 개괄 정리한 책이다. 우리 역사와의 연관성을 서술하며 올바른 역사를 직시하게 한다. 일본은 한때 가톨릭 포교를 용인했다. '바테렌 추방령'을 내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1586년 3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일본 선교 총책임자인 가스파르 코엘료를 접견했다. 그해 5월4일에 예수회의 포교에 대한 허가증을 발급했다. 배경에는 조선과 명나라를 침공하려는 야심이 숨어있었다. 코엘료에게 전투 계획을 털어놓으면서 때가 되면 포르투갈 선박 두 척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코엘료는 찬성했다.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과의 합동 작전을 제안했다. 권력자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선교를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는 거꾸로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도요토미가 파악하게 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진행된 도요토미의 규슈 정벌 또한 예수회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됐다.이 책은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도요토미는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기리시탄 영주들이 매우 강압적이었다는 사실과 나가사키에서 노예무역이 이뤄지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반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소와 말을 식용으로 도살한다는 사실도 그의 불교적 감성으로는 못마땅했다." 조 저널리스트는 도요토미가 규슈 정벌 뒤 후쿠오카를 찾으면서 코엘류의 푸스타 호를 확인한 사실에도 주목한다. "배를 상세하게 관찰하고 칭찬하면서 '이것은 틀림없이 군함'이라고 말했다. 포르투갈 전함을 갖고 싶다는 욕망과 배에 대한 공포심을 동시에 느낀 거다." 예수회 동인도 선교 총책임자였던 알렉산드로 발리냐노는 도요토미를 달래려고 조선 출병에 협력했다. 실제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대부분은 가톨릭교 영주들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조선에서 6년이나 머물렀다. 그러나 예수회의 노력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훗날 잔혹한 기독교 탄압을 막지 못했다. 일본 전역에서 많은 기리시탄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현명한 남자라고 자부했으나 제 살 깎기에 불과했던 셈이다.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