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기자
일본의 근대화를 의미하는 '메이지유신'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일왕 메이지(1867~1912 제위)의 모습. 볼품없어 보이는 외모(왼쪽)를 보완하기 위해 사진 위에 그림을 덧대어 그리는 방식(오른쪽)으로 공개용 사진은 보정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50주년 기념 행사가 일본의 주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전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메이지유신은 일본 내에서는 아시아지역 최초의 자발적 근대화 운동으로 오늘날 현대 공업대국 일본을 만든 토대로 일컬어지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제 침략을 겪은 아시아 주변국들에게는 일제의 군국주의 망령이 태동된 시점으로 여겨진다. 일본은 최대한 과거사 문제는 축소하고, '메이지 산업혁명'이란 이름으로 이를 포장하려고 하고 있다. 이 과거사 포장 속에서, 정작 주인공인 일왕 메이지는 제대로 된 모습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NHK등 일본 현지 언론들에 의하면, 23일 일본정부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행사를 대대적인 정부 공식행사로 개최한다. 전국에서 85개에 이르는 유신관련 행사들을 열고, 특별 인터넷 사이트도 개설했다. 또한 공영방송인 NHK에서는 과거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메이지시대 정치가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일대기를 담은 사극 드라마도 방영 중이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지유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일왕 메이지(明治)와 관련한 내용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 현대 일본에서도 메이지유신이라고 하면 보통 '유신 3걸'이란 인물들이 크게 부각된다. 이들은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내치론자로 분류되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 孝允) 등 당시 서구화를 주도했던 하급무사 출신 정치인들이다.일본 공영방송인 NHK에서 메이지유신 150주년 특집으로 방영 중인 세고돈(西?どん)의 주인공, 사이고 다카모리의 모습. 그는 오늘날 가고시마인 과거 사쓰마번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을 이끈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관련 저작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사진=NHK 홈페이지)
메이지유신 당시 일왕 메이지는 이제 나이가 열 여섯살, 10대 청소년에 불과했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1868년 10월23일은 그가 즉위한지 1년 8개월정도 지났을 때이자, 그의 즉위식이 열린지 고작 열흘 정도 지난 뒤였다. 더구나 당시까지 일왕은 실권이 하나도 없이, 무려 700년간 막부 치하를 견뎌낸 상태였으며 일왕 수하에 병력이라고는 교토 왕궁의 수비병력 400여명 남짓이 전부였다. 1867년부터 1912년까지 무려 45년이나 왕자리에 앉아있었고, 현대 일본과 우익세력들에게는 무려 '대제(大帝)'라는 칭호로까지 불리는 인물이지만, 유신과 관련한 업적이 상세히 소개되거나 그의 영웅적 일대기가 그려진 2차 저작물들은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두루뭉술하게 기술되거나, 우수한 신하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한 명목상 군왕의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다.이름은 메이지유신이지만 이처럼 정작 메이지가 부각이 잘 안되는 이유는 그의 이미지 대부분이 철저하게 포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미지 조작이 들어간 부분은 그의 사진이었다. 흔히 교과서나 역사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그의 사진 중 실제 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은 드문 편이다. 메이지는 군왕으로서의 기품이 뛰어나거나 외모가 훌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는 전반적으로 왜소했고, 외모가 뛰어나지도 못했으며 어릴때 앓은 천연두로 인해 얼굴은 곰보투성이였다고 한다. 일국의 군왕으로서 내세우기에는 멋진 모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왕의 외모는 궁에서 그리는 어진(御眞) 외엔 담지 못하게 돼있어 상관없었으나, 왕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사진을 공개하던 당시 서구 풍습에 맞추려면 대대적인 이미지 조작이 필요했다. 그의 사진은 사진 위에 화가들이 서구형 미남의 풍모와 체형으로 그림을 다시 그려 조작해서 내보내졌다.즉위 5년때이자 20세 때인 1872년, 전통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은 일왕 메이지의 모습. '메이지 산업혁명'이란 말이 무색하게 메이지 본인은 근대화에 소극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사진=위키피디아)
메이지 정부 시절부터 일왕 메이지를 직접적인 간판스타로 내걸기 힘든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메이지유신이란 명칭과 달리 메이지란 인물은 근대화, 서구화에 몹시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일본 궁정 예법 연구가인 요네쿠보 아케미(米窪明美)가 쓴 '천황의 하루'에서 메이지는 궁정도 서구화를 시켜야한다는 대신들의 요구에도 꿋꿋이 전통 궁정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복고적인 인물로 묘사된다.메이지는 서구 의사를 매우 불신했고, 죽을 때까지 한의학을 신봉했다고하며, 사진이나 영화 등도 싫어하고 서예나 다도같은 전통적인 행사에 집착했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한편으로 일본 왕실 전통의 일부다처제를 고수하던 메이지로 인해 당시 일본은 서구국가들에게 여전히 뒤쳐진 사회로 여겨졌으며, 이로인해 다음 일왕이 된 다이쇼 때 일본 정부는 일왕의 일부일처제를 강력하게 주장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메이지 산업혁명이란 포장된 이미지 속에 가려진 실제 그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전통시대 동양의 작은 나라 임금에 불과했던 셈이다.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