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영화 '말아톤' 스틸 컷
지나간 시절 큰 인기를 누리던 '유머 일번지'의 영구(심형래)나 '개그콘서트'의 맹구(이창훈)는 모두 발달장애인이었다. 흰 물감으로 콧물을 그리고 바보 흉내를 냈다. 정준하(47)도 '노브레인 서바이벌'과 '무한도전'에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말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연기로 웃음을 샀다. 그가 나오면 브라운관에 자막이 떴다. '동네 바보 형.''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의 저자 류승연씨는 초등학생 발달장애인을 키우는 엄마다. 그는 개그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가 불편하다. "유명 진행자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 바보 형이란 말을 내뱉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사회적 책임감'이란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방송국 관계자들과 PD들,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 및 개그맨들에게 강력히 요청한다. 인지 문제가 있는 발달장애인을 바보 취급하며 웃기는 존재로 묘사하는 걸 중단해달라고. 당신들이 동네 바보 형이라며 놀리는 건 분장을 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 아들이라고."이 책은 세상의 시선이 가장 힘들다는 엄마가 진심을 다해 쓴 일기다. 2016년 11월부터 '더 퍼스트 미디어'에 연재한 '동네 바보 형'을 정리했다. 저자도 10년 전에는 길에서 발달장애인을 보면 외면하곤 했다. 뇌성마비 장애인 옆을 지나가면서 치마가 휠체어에 닿을까봐 잔뜩 긴장한 채 걸음을 옮겼다. 치마가 휠체어에 닿는 순간 '장애인 바이러스'에 옮기라도 할 것처럼. 저자의 아들은 출산 당시 뇌손상에 의한 후유증으로 장애가 왔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와 가족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그녀는 세상의 다른 모습과 마주했다. 장애인을 향한 차가운 시선과 장애인 가족에 대한 편견과 오해다. 차갑고 고통스런 시간이 이어졌다.영화 '말아톤' 스틸 컷
저자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장애인 복지의 현주소를 아프게 건드린다. 복지 전문가나 인권 연구가가 쓴 장애 관련 전문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장애아를 키우며 부딪친 문제들에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해 무엇부터 잘못됐는지 조목조목 짚는다. 이 시각은 엄마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자신을 버리기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행복한 장애아의 엄마가 되는 길을 택했다. 틈이 나는 대로 글을 쓰며 장애는 아이가 가진 특성일 뿐 가정의 장애가 아님을 깨닫는다. 이 여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책에 실리지 않은, 지난 2월28일 더 퍼스트 미디어에 기고한 글이 말해준다."문제는 딸이다. 엄마들 얘기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남동생이 보는 '뽀로로'는 너무 시시하다. 한쪽에 자리 잡고 간식을 좀 먹더니 나에게 와서 하소연을 한다. '엄마~ 심심해~'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 다 비슷한 또래의 초등학생들이야.' '장애인이랑 뭐를 하고 놀아?' (중략) 나는 월례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딸을 따끔하게 혼내기 시작했다. '장애인이랑 뭐를 하고 노냐고? 왜? 장애인은 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야' (중략) 이어지는 딸의 이야기가 놀랍다. 장애인은 창피한 게 아니라고 하면서 왜 장애인을 장애인이라 못 부르게 하냐고 한다. 장애인이란 말은 하면 안 되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장애인은 행동이랑 생각이 나랑은 다르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래서 어떤 놀이를 하면 좋은지 엄마한테 물어본 것인데 왜 화를 내느냐고 한다."초원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던 경숙도 둘째 아들 중원에게 비슷한 말을 듣는다. "엄마 힘들어. 네가 이러지 않아도 힘들다고." "엄마는 나하고 입장 바꿔서 생각해본 적 있어?" "뭐야?" "한 번이라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봤냐고. 엄마한텐 초원이 밖에 없어. 엄마는 걔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지. 그렇지만 난" "네가 형이랑 똑같아? 말로 하면 될 거 아니야." "말했어.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엄만 한 번도 안 들었어." 앞으로도 계속될 시행착오들. 저자가 이 책에서 보내는 당부와 위로의 메시지가 공감과 연대의 손길로 이어진다면 걸음은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그녀의 긴 여정에 응원을 보낸다.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