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의 행인일기⑦]이별의 기술을 소년에게

지하철에서 소설을 읽고 가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습니다. 두어 정거장 더 온 것이면 이내 돌아섰을 텐데, 한 이십분은 더 달려온 것 같았습니다. 퍽 낯설게 느껴지는 지명이 여기가 종착역도 멀지 않은 곳이란 것을 알게 했습니다. 순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마침 특별한 스케줄도 없고, 게으름도 좀 피우고 싶은 터라 무작정 밖으로 나섰습니다. 처음 와 본 곳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서 낯선 동네를 기웃거리며 걷는 재미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초행길의 설렘과 흥분을 즐겨보기로 했습니다.덕분에 '플리(flea)마켓'을 만났습니다. 물론 저는 '벼룩시장'이 훨씬 더 친숙합니다만, 요즘은 그렇게 쓰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그런 곳은 대개 젊은 사람들의 장터이기 십상이지요. 어쨌거나 불쑥 차에서 내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갈 길이 바쁘지 않은 사람에게 그만큼 흥미로운 구경거리도 흔치 않으니까요.뿐이겠습니까. 눈 밝은 사람은 뜻밖의 횡재를 할 수도 있고, 재수가 좋은 사람은 꿈에 보던 물건을 만나기도 하는 골목의 장 구경. 저 역시 은근한 기대를 품고 모여선 사람들과 늘어놓은 물건들을 번갈아 할끔거리며 걸었습니다. 저를 기다리는 물건이 있을 것만 같아서 아주 느린 걸음으로 장터 한 바퀴를 다 돌았지요.그러나 제가 바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실망스러워하며 돌아서려는데 길 끝에 혼자 앉은 소년이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였습니다. 뙤약볕 아래, 꽤 값이 나가게 생긴 공룡 인형 두 마리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서툰 글씨로 가격표를 붙여놓았더군요. 하나는 이천 원, 하나는 천 오 백 원. 제가 보기에도 턱없이 싼 값이었습니다. 궁금하기도 하고 땀으로 얼룩진 소년의 얼굴이 안쓰럽기도 해서, 이것저것 말을 붙여보았습니다. "혼자 나왔느냐, 이걸 팔아서 뭘 하려느냐. 엄마아빠가 알고 계시느냐." 제 물음에 대한 소년의 답은 이러하였습니다. "꼭 갖고 싶은 로봇이 새로 나왔는데 그걸 사려면 이걸 팔아야 해요." 그래봤자, 삼천오백원인데 그것으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사겠느냐고 물었지요. "나머지는 아빠가 주신댔어요."전후 사정이 대충 짐작되더군요. 상황을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새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릅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이 늘 갖고 놀던 장난감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를 통해, 아들이 신상품 로봇에 반쯤은 넋이 나가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끔찍이 좋아하던 공룡들이 이제 싫어진 모양이구나. 만일 네가 새 친구를 만나면, 네 사랑을 잃은 그 애들은 이제 어쩌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너만큼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보는 거야. 너는 싫증이 나지만, 누군가는 간절히 갖고 싶은 물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떠냐. 너도 새 친구를 만나고, 또 누군가에게도 새 친구를 만들어주지 않겠니." 결론부터 앞세우자면, 소년의 아버지는 참 좋은 선생님입니다. 그는 압니다. 이젠 필요 없어진 물건, 간수하기조차 귀찮아진 물건, 공연히 붙잡아두고 있는 물건…. 아이들의 물건이라면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야 할지, 누가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런 수업은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는 것도 압니다. 참 많은 문제에 답을 주고, 만물을 행복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마음씀씀이가 천수(天壽)를 채우지 못하고 사라질 물건이 제 명(命)을 다 누리게 합니다. 이 땅의 자원과 에너지를 알뜰히 쓸 수 있게 합니다. 인간의 상품이나 하늘이 지은 물건이나 만물이 제 복을 누릴 때, 지구의 장수(長壽)도 보장됩니다. 하여, 부모라는 이름의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놀라움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관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동시에, 그것들과 평화롭게 헤어지는 법도 가르쳐야 합니다. 생명 가진 것은 물론,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사랑과 우정의 문법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별의 기술이 필요한 까닭을 가르쳐야 합니다.그 교실을 나온 소년은 압니다. 자신이 가진 물건의 장점과 매력이 제 눈에 다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손에서 더 빛나고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압니다.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물건이 그리 많지 않음과 잠깐 지니는 물건들이 의외로 많음을 압니다. 죽을 때까지 제 것이라고 우길 수 있는 물건이 별로 없음을 압니다. 이쪽 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선수가 저쪽 팀에 가서 펄펄 나는 슈퍼스타가 되는 경우가 스포츠세계의 일만이 아님을 압니다.소년은 자라서 퍽 향기롭고 값나가는 어른이 될 것입니다. 정들었던 자동차와 헤어지는 날, 친구나 연인과 이별할 때만큼 애틋한 어조로 진심어린 하직(下直)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잘 가라, 조금 전까지는 내 것이었던 사랑이여!" 윤제림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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