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콤플렉스⑥]대감, 나랑 딱 30일만 놀겠다는 말씀이오?

빈섬스토리 - 사랑, 그건 미색에 홀린 자들이 작전상 읊는 '화장발 언어'니라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양곡(소세양 판서)은 두 가지 놀랄 만한 약속을 한 셈이다. 하나는 황진이와 동거를 하겠다는 얘기이고, 또 하나는 그 동거를 정확하게 한달 만에 끝장내겠다는 것이다. 나는 임방이 말하는 소세양의 ‘젊은 시절’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겠다. 과연 몇 살 때의 일일까. 그때 황진이는 몇 살이었을까. 젊은 시절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이 시절 황진이가 소세양을 소판서(蘇判書)라고 부르는 것을 참고하면 최소한 1931년 이후(소세양은 당시 형조판서를 지냈다)이다. 한달씩이나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면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라고 볼 수 있다. 46세 쯤으로 잡는다면 1832년이다. 황진이의 명성이 한양에까지 자자했던 때였으니 황진이도 나이가 스물 다섯을 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어림잡으면 황진이는 1507년생이 된다. 이럴 경우, 허균의 아버지 허엽(김탁환 소설에서 황진이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로 묘사된)은 1517년생이니, 황진이보다 10살 아래다. 벽계수에게 황진이에 관한 자문을 해줬다는 손곡 이달은 1561년생이니(황진이가 죽은 다음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야기 자체가 아예 성립이 되지 않는다. 벽계수에게 그런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면 손곡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화담 서경덕은 1489년생으로 황진이보다 18살이 많다. 여하튼 마흔 여섯 살의 패기만만한 사내가 스물 다섯 살의 기고만장한 기생을 만나러 갔다. 어떻게 되었을까. 가을 저녁 강가에서 소세양은 시를 읊는다. 쓸쓸하네 외로운 그림자 하나 노을진 강가붉은 여뀌꽃 남은 송이 강 기슭 양쪽이 어둡다서풍을 향해 느리게 걸으며 옛 짝을 부르네만겹이나 될 만큼 깊은 운우(雲雨, 섹스)의 정, 알 수 없어라 蕭蕭孤影暮江심(水+尋) 紅蓼殘花兩岸陰소소고영모강심 홍료잔화양안음만(言+曼)向西風呼舊侶 不知雲水萬重深만향서풍호구려 부지운수만중심 이 시는 소세양이 호남에 은퇴한 시절 좌의정 상진(尙震)이 가져온 그림족자에 써준 화제(畵題)이다. 상진이 좌의정이 된 것은 1551년이니 소세양 나이 65세 이후에 쓴 것이다. 그러니 마흔 여섯 살의 그가 쓴 시도 아니고, 반드시 황진이에게 썼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만향서풍호구려'에서 황진이를 느낀다. 그림 속에는 기러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저무는 강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 하나. 그 그림자가 고요한 강에 어른어른 비친다. 강둑에 핀 여뀌꽃은 거의 다 졌다. 여뀌꽃을 아는가. 꽃같지도 않은, 뭉친 깨알들같은 작고 길쭉한 꽃덩이를 달고 있는 물가의 꽃. 흰 빛이 나는 것과 붉은 빛이 나는 것이 있는데, 저마다 희미하고 하늘하늘하여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꽃이다. 그나마 다 시들었다. 어둑어둑해져오니 여뀌꽃부터 그늘에 잠긴다. 마치 옛 기억들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말이다. 강 쪽을 가만히 쳐다보던 소세양은 하늘에 나는 외기러기를 본다. 서풍을 따라 짝을 찾아 느릿느릿 날아가는 그는, 소세양을 닮았다. 젊은 시절 황진이가 있던 관서(關西)이기도 하고, 그 서쪽은 바로 새가 깃드는 둥지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림을 보니 서쪽 하늘은 첩첩의 구름이 끼어 어디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옛날이란 그렇게 겹친 기억과 망각들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옛짝을 부르지만 대답할 리 없다. 여기서 소세양은 운수(雲水)라는 말을 썼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떠올린 까닭이다. 바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겹겹 구름들을 핑계 삼아 행복하던 날들을 슬쩍 새겼다.

2006년 KBS2 드라마 '황진이'의 하지원.

장안에서 이름 높은 시인 소세양인지라 황진이도 반가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이 남자는 희한한 말을 한다. “내 오늘 달 밝은 밤에 명월을 품고, 다음 명월이 나올 때까지만 그대를 품으려고 왔노라.” 다른 기생들 같았으면 화를 내거나 지레 서러워 엉엉 울겠지만, 황진이는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공은 정말 풍류객이십니다. 그리 하실 수 있다면 그리 하십시오.” 그녀는 선선히 그렇게 말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렸을까. 남자는 왔다가 떠나가는 것이다. 사랑? 그건 미색에 홀린 자들이 작전상 읊는 ‘분식한 언어’일 뿐이다. 이 남자는 오히려 솔직하지 않은가. 나는 기생이다. 딱 30일만 놀겠다는 고객이라면 참으로 쿨하지 않은가. 그 말이 황진이의 승부욕을 자극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많은 사내들을 보아왔지만 호언하는 자 치고 그 말을 깨지 않는 자를 보지 못했다. 특히 아름다움에 눈멀어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사내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나의 아름다움이 한겹 껍데기의 조화이며 한 시절의 빛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것으로 자랑 삼으려 할 까닭이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색(色)이 인간의 이성을 뒤흔드는 것임을 보아왔다. 이것 또한 하나의 도(道)라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쳐주고 싶구나. 그대는 다음달 명월 아래서 명월은 품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명월은 당신 양곡(陽谷, 태양의 골짜기)을 환히 비추리라. 그래서 이 소문난 동거는 긴장감 넘치는 게임이 되었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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