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원주민 착취 막기 위해 10년만에 다시 정글로 돌아온 영웅
기본 설정에선 기존의 틀 벗었지만 스토리 효과적으로 풀어내지 못해
열차장면선 맨손으로 한 소대 때려잡고 하이라이트 전투장면서도 비상식적 전개
제인 등 조연의 빈약한 역할도 아쉬워
'레전드 오브 타잔' 스틸 컷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의 '레전드 오브 타잔'[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타잔은 아프리카 정글의 왕인데 백인이에요. 아프리카 전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다 때려눕히고, 사자의 턱주가리도 돌려요. 동물들과 얘기도 하죠.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몇 백년간 거기 살아도 그렇게 못해요. 오직 타잔만 할 수 있죠."지난달 3일 세상을 떠난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말이다.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의 흑인들은 아프리카와 얽히기를 꺼렸다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무지하고 심지어는 식인종으로 묘사됐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타잔'은 이를 정형화한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영화로 100여 편, 텔레비전 시리즈로 300여 편이 제작됐다. 인종차별적 시각이 담긴 영화는 많다. 세계 영화사에 중요한 감독으로 기록된 D. W. 그리피스는 1915년 '국가의 탄생'을 만들었다. 흑인에 폭력을 행사한 KKK단의 창단과 의의를 극우적 색채로 그렸다. 흑인들의 참정권 획득과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 확보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흑인인권단체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는 거세게 반발했으나 개봉을 막지 못했다. 백인들이 흑인들의 부정적 반응에 대한 적대적 대응으로 극장을 찾아 오히려 흥행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
W.S. 밴 다이크 감독의 '타잔, 유인원 인간(Tarzan the Ape Man·1932년)' 스틸 컷. 타잔을 연기한 조니 와이즈뮬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를 딴 미국의 간판 수영선수다.
할리우드는 이후 100년 동안 정치적 공정함을 키워왔다. 흑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흔하다. 서부극에서 인디언도 더 이상 악당으로 나오지 않는다. 백인우월주의의 탈을 완전히 벗은 것은 아니다. 모험, 액션 등을 다룬 영화에서 적잖게 민낯을 드러낸다. 피터 잭슨(55)의 '킹콩(2005년)'에서 해골섬의 원주민들은 미개하고 폭력적이다. 잭 스나이더(50)의 '300(2006년)'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스파르타를 위해 몸을 던지는 백인 병사들의 용맹함에 초점을 두고 찬양을 반복한다. 반대편 진영에는 흑인과 아시아인들이 있다. 얼굴과 몸이 기형이거나 장애가 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292만9400명을 동원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네 편이나 연출한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53)은 이런 세계관을 벗어나려고 한 듯하다. 알리가 못마땅하게 여겼던 타잔에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할 여지가 많은 배경을 끌어왔다. '콩고의 학살자'로 불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다. 모험가 헨리 스탠리를 앞세워 중부 아프리카에 '콩고 자유국'을 세웠고,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중립지대로서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벨기에 국토 면적의 76배에 달하는 이 곳을 개인 소유지로 취급했다.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야생 고무 채취를 명령하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신체를 절단하거나 죽였다. 사망자는 최소 8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역설적으로 당시 가장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은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규탄했다.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은 그 실태를 파악하는 조사단에 타잔을 합류시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300(2006년)' 스틸 컷
영국에서 10여년 정착한 타잔(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은 그레이스토크 백작 혹은 존 클레이튼 3세로 불린다. 노예해방의 수혜를 받은 미국인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사무엘 L 잭슨)는 영국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유색인종 착취를 막자고 주장한다. 타잔에게 함께 실태를 조사하자고 제의한다. 타잔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한다. "그곳은 너무 덥다." 대사에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살면서 생긴 근심과 갈등이 서려있다. 백인우월주의를 타파할 만한 전개를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레전드 오브 타잔은 이들이 아프리카를 찾으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풀어내지 못한다. 타잔이 아프리카로 향하는 계기도 약하지만, 무엇보다 레오폴드 2세의 만행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예이츠 감독은 오히려 악당을 온순하게 표현했다. 타잔을 아프리카로 불러들인 것은 벨기에 특사 레온 롬(크리스토프 왈츠)의 계략. 복수심에 사로잡힌 음봉가(디몬 하운수)에게 타잔을 넘기고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려고 한다. 야심이 가득하지만 행위는 신사처럼 젊잖다. 제인(마고 로비)을 납치하지만 스테이크를 내주고 마주앉아 식사를 할 만큼 정성껏 배려한다. 아프리카 원주민 등을 탄압하는 악당이라기보다 다이아몬드 광산과 총독 자리에 눈이 먼 인물이다. 타잔은 동시대에 탐험가로 이름을 알렸지만 스탠리와 정반대의 평가를 받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닮았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탐험하는 동안 노예제도에 반대하며 불행에 처한 이들을 구했다. 타잔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원주민, 동물 등과 교감한다. 제국주의를 저지하는 투사로도 활동한다.
'레전드 오브 타잔' 스틸 컷
그러나 레전드 오브 타잔은 백인우월주의를 벗고 긴장을 유도하는데 있어 한계를 보인다. 타잔은 달리는 열차의 좁은 칸에서 한 소대를 맨손으로 때려잡는다. 싸움은 긴장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싱겁게 끝난다. 반면 윌리엄스와 원주민들은 힘을 모아 겨우 기관사 한 명을 납치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둣가 전투는 이보다 더 허무하다. 타잔이 물소, 사자, 고릴라 등과 함께 총공세에 나서는데, 열세였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공격이 강하고 빠르게 표현된다.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망자의 군대가 아르곤의 명령을 받고 오크들을 손쉽게 물리치는 모습이 연상된다.더욱이 타잔은 동물들과 함께 달리다가 "야생동물은 길들일 수 없다"던 신념을 깨고 물소의 등에 올라탄다. 이 모습은 동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조련사처럼 나타난다. 윌리엄스나 원주민들이 해내는 역할은 당연히 거의 없다. 특히 윌리엄스는 흑인이고 남북전쟁과 멕시코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베테랑이지만 유쾌한 농담으로 타잔의 피로를 덜어주는 역할에 그친다. 제인도 다르지 않다. 이전의 타잔 시리즈에서와 달리 능동적으로 그려졌지만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신 등을 유니세프 광고로 만들어 버린다.
'레전드 오브 타잔' 스틸 컷
무엇보다 이 영화의 약점은 타잔의 대사에 있다. "밀림은 모든 걸 삼켜버리지. 늙고 병들거나 다치고 약하면 살아남지 못해. 강해야만 해." 제국주의를 향한 경멸. '밀림' 대신 '제국'을 넣으면 뜻은 완전히 달라진다. 타잔은 여전히 알리에게 못마땅한 아프리카 정글의 왕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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