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설문응답 절반 이상 '한국사회 남녀혐오 심각'…여혐 반발 남혐으로 번질 우려
그림=오성수
[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부애리 기자] 강남역 10번 출구에 있던 이른바 '강남 묻지마 살인' 피해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은 24일 오전9시 서울시청 지하1층 시민청으로 이전됐다. 비가 예보된 탓에 현장 훼손을 우려한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철거를 결정했다. 이후 부산, 대구 등 전국 추모공간에 있던 기록물과 합쳐져 서울 동작구 대방동 여성가족재단 1층으로 옮겨진다.한편 이날 오전 9시부터 30여분간 사건 현장인 건물 공용 화장실에서 진행된 현장 검증에서 피의자 김모(34)는 범행 장면을 재연했다. 김씨는 현장 검증에 앞서 "유가족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희생된 피해자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감정이 없고 어찌됐든 희생돼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심정을 묻는 질문엔 "담담하다. 차분하다"고 짧게 대답했다.강남역 추모 현장은 정리되는 분위기지만 온라인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여성혐오(여혐)와 남성혐오(남혐)가 대립전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남성혐오와 여성혐오, 심각성은?= 여성단체 한국여성의전화엔 며칠 전부터 초상권 침해와 신상정보 공개로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강남역 추모 현장과 지난 주말 한국여성민우회 등 일부 여성단체들이 주최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다가 찍힌 사진이 일부 커뮤니티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제보였다. 반대로 강남역 추모 현장에 핑크색 코끼리 복장을 한 남성이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것이다, 더 안전한 대한민국, 남녀가 함께 만들자'라는 내용의 화이트보드를 들고 등장했다가 이를 반대하는 추모 참가자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우리 사회에 똬리를 틀고 있던 남성과 여성 간 혐오 인식이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아시아경제가 10대부터 50대까지의 남녀 18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53.7%)이 남성혐오와 여성혐오의 대립이 심각하다고 대답했다. 응답자들은 또 남녀 차별이 발생하는 장소로는 직장(44.3%), 공공장소(19.5%) 등을 많이 꼽았다. 우리 사회의 이성간 대립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일상화 돼 버린 남혐·여혐= 묻지마 살인 사건 이후 추모 행사에 불이 붙은 것은 여성혐오에 대한 분노가 표출됐기 때문이다. 혐오는 이미 일상화돼 마치 하나의 놀이처럼 개그의 소재로 활용된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선 여성혐오적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되고 있다.여성을 조롱하는 소재로 만들어지는 신조어는 끝이 없다. '상폐녀(상장폐지녀의 줄임말, 여성이 매력이 없어져 시장가치가 떨어졌다고 비하하는 말)','김치녀(한국 젊은 여성을 비하하는 말)' 등이 대표적이다. 극우성향 온라인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상폐녀'를 검색하면 야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각종 인신공격성 글들이 쏟아진다. 이외에도 삼일한(여자는 3일에 한 번 패야 한다), 성괴(성형괴물의 줄임말로, 성형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등과 같은 단어들도 자주 등장한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모씨가 24일 서울 서초구 강남역 주변 건물 화장실에서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출처=백소아 기자)
반(反)여성혐오커뮤니티인 '메갈리아4' 운영자 이모씨는 "여성혐오적인 사회는 남성의 잘못된 행동은 개개인의 잘못으로 여기는 반면에 김여사(운전을 못하는 여성을 지칭), 맘충(자신의 아이만 귀하게 여기는 엄마를 조롱하는 말) 등 여성 개개인의 잘못을 여성 전체의 잘못으로 너무나도 쉽게 접근한다"고 말했다. 여혐에 대한 반발심은 또 다른 혐오, 남혐을 낳는다. 이제는 '한남충'이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남충은 한국 남자, 벌레를 섞은 말로 남성을 비하하는 용어로 여성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취업준비생인 박씨(28ㆍ여)씨는 면접을 보러 가면 왠지 모르게 항상 남자 지원자가 유리한 느낌을 받는다는 고민을 털어놨는데, 친구가 "혹시 너 메갈리아(여성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하는 것 아니냐"며 면박을 줘 민망했던 경험이 있다.◆해법은 없나= 그동안 온라인상에 퍼져있던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제기는 많았지만 이렇게 집단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다. 쌓여있던 여성혐오에 대한 반발감이 이번 사건을 통해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여성혐오에 대한 원인은 다양하다. 경제적 불안과 여성 사회 진출로 인한 남성의 우위 저하, 여성을 약자로만 인식하는 성 교육 문화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남성혐오 또한 명확하지 않지만 여성혐오의 미러링 현상으로 볼 수 있다.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서로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공생의 관계에 있다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이번 사건을 여성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디딤돌로 삼아 여성 문제에 대한 의식이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일상에 보이지 않는 성 차별에 대한 민감성을 높이고 좀 더 공론화해 각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박미숙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일상에서 혐오의 발언을 해놓고 농담인데 정색하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며 "약자 혐오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부애리 기자 aeri345@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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