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이사)
사람들은 항상 합리적인 선택을 할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분명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선택을 미루기 일쑤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영국의 몇몇 기업에서는 종업원은 전혀 돈을 내지 않고 회사가 비용을 전부 부담하는 방식으로 퇴직연금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퇴직연금에 가입하려면 가입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합리성을 이기는 귀차니즘 그렇다면 신청자는 얼마나 됐을까? 근로자 입장에서 보면 따로 돈을 더 내는 것도 아니므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가입신청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퇴직연금제도를 운영하는 사업장을 조사했더니 가입자가 절반(51%)밖에 안됐다. 나머지 절반은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인간의 합리적 이성보다 관성이 더 크게 작용한 듯 하다. 먼 미래의 이익을 좇으려고 눈앞에 불편을 초래하기보다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먼 미래의 이익보다는 눈앞의 귀찮음이 영향력을 더 크게 발휘한 셈이다. 그렇다면 근로자가 스스로 퇴직연금에 가입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퇴직연금 가입순서만 슬그머니 바꾸었더니 결과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났다. 본래 근로자가 먼저 가입신청을 해야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있던 것을, 일단 퇴직연금에 먼저 가입하게 한 다음 원하는 사람만 탈퇴신청을 받아주기로 한 것이다. 단순히 의사결정 순서만 달리 했을 뿐인데, 효과는 탁월했다. 미국에서 이 같은 순서로 퇴직연금을 도입한 회사에서 3개월 후 신입사원의 퇴직연금 가입비율이 98%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전체 직원의 퇴직연금 가입비율도 도입 3개월째 20%에서 36개월째에는 65%로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일단 가입하면 탈퇴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와 같이 단순히 의사결정 순서를 바꾸는 부드러운 개입을 통해 사람들의 선택을 바꾸는 것을 '넛지(Nudge)'라고 한다. 본래 넛지(Nudge)란 시카고 대학의 행동경제학자 리차드 세일러와 하버드대학 로스쿨 캐스 선스타인 교수가 함께 쓴 동명의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 책에서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는 의미로 넛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눈에 띄는 혜택이 없으면 넛지도 안 통한다 미국에서 넛지효과에 고무된 탓일까? 국내에서도 퇴직자로 하여금 퇴직급여를 연금으로 수령하도록 하기 위해 넛지를 활용하기로 했다. 2012년 7월 이전까지만 해도 퇴직자는 먼저 퇴직금을 일시에 현금으로 수령하고, 연금으로 받고 싶은 사람만 '개인형퇴직계좌'(IRA)에 이를 다시 이체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손에 쥔 퇴직금을 다시 내놓으려는 퇴직자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결정 순서를 바꿨다. 먼저 퇴직연금 가입자로 하여금 퇴직급여를 '개인형퇴직연금'(IRP)로 의무적 이체하도록 한 다음 필요한 사람만 해지해서 일시금으로 찾아 쓰게 한 것이다. 효과는 어땠을까? 미국에서만큼 탁월하지 못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해야 옳겠다. 목돈을 손에 쥐려고 퇴직자는 계좌를 해지하는 수고쯤은 기꺼이 감수했다. 심지어 퇴직급여가 IRP로 이체되자마자 해지하는 사람도 허다했었다. 그리고 지난해 1/4분기만 하더라도 퇴직급여를 연금으로 받는 비율은 3.1%에 불과했었다. 왜 바뀐 이체방식이 퇴직자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지 못했을까? 이에 대해 <넛지>의 공저자 선스타인 교수는 몇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먼저 '강한 선호'가 있는 경우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얻으려고 어느 정도 수고는 감수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당장 목돈을 손에 쥐는 것을 먼 미래에 연금으로 나눠 받는 것보다 좋아한다. 따라서 눈에 띄는 혜택이 없으면 계좌 해지에 따르는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 둘째,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손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경우에도 디폴트옵션은 지켜지지 않는다. IRP계좌는 해지신청서 한 장만 작성하면 간단히 해지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퇴직할 때 퇴직금을 IRP로 이체신청서를 작성하면서 바로 해지신청서를 함께 작성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셋째, 극단적인 디폴트옵션은 지켜질 가능성이 낮다. 퇴직연금가입자는 퇴직금을 전부 IRP계좌로 이체해야 하고, 일단 IRP로 이체한 적립금은 일부만 꺼내 쓸 수도 없다. 결국 일부 인출이 안되니 전부 해지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세금 30% 깎아주자, 연금 수령자 2배 늘었다 이쯤 되면 추가적인 제도 손질이 불가피하다. 정부가 우선 손을 댄 것은 세금혜택이다. 2015년부터 퇴직금을 연금으로 수령하면 세금을 30% 경감해주기로 했다. 예를 들어 퇴직금을 일시에 받을 때 1,000만원을 퇴직소득세로 내야 하는 사람이 이를 IRP에 이체하고 10년 동안 연금으로 받으면 70만원씩 10번 세금을 내게 된다. 퇴직소득세가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애써 IRP계좌를 해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부터 퇴직자에게 좀 더 큼직한 당근을 주기로 했다. 퇴직급여를 연금으로 받으면 세금을 30%나 경감해 주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퇴직금을 일시에 수령할 때 퇴직소득세로 1000만원을 납부해야 하는 사람이 이를 연금으로 받으면 세금을 최대 300만원이나 절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절세혜택이 알려지면서 장기근속자와 희망퇴직자 등 퇴직소득세 부담이 큰 사람들을 중심으로 IRP에 퇴직급여를 이체하기 시작했다. 2015년 동안 근로자의 퇴직 등으로 IRP계좌로 새로이 이체된 퇴직급여로 지급되지 않고 남은 돈이 2조5천 억 원에 육박한다. 그리고 퇴직급여를 연금 받아간 사람도 연초 3.1%에서 7.1%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IRP 적립금 중 일부를 찾아 쓸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는 법에서 정한 부득이한 사유가 아니면 IRP 적립금은 일부만 찾아 쓸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이렇게 부분인출이 불가능하다 보니 애당초 IRP로 퇴직금이 이체되자마자 해지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 같은 제도 변화가 근로자가 퇴직금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비율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이사) <‘투자의 가치, 사람의 가치’ ⓒ아시아경제TV(tv.asiae.co.kr) 무단전재 재배포 금지><ⓒ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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