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돋는 첫 아침, 정동진에 가고싶다

정동진에 가고 싶다. 꿈에 젖은 포구. 어둠에서 건져낸 푸른 동해로. 내 청춘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저녁, 문득 청량리역 삽상한 바람에, 탁해진 눈망울 씻으며 훌쩍 밤기차를 타리라. 뿌리치며 떠나가는 시간의 기적소리. 황망한 이별의 슬픈 손수건. 바다는 언제부터인가 미친 그리움이 되었다. 울혈의 삶이 좁은 그릇 안에서 흔들리고 출렁거려 깊어지고 깊어진 멀미. 마침내 살을 찢어 콸콸콸 솟아나는 핏줄기처럼 시원스런 꿈의 폭죽. 거기 기찻머리 흑암(黑闇)을 뚫고 뚫어 마침내 환한 자리에 희망이 눕는 거기로 가고 싶다. 버릴 것들 모두 버리고 헐벗은 넋으로 바다에 가고 싶다.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바다. 안개의 바다. 무명(無明)의 푸른 눈. 번들거리는 새벽 차창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의 어둑한 피안(彼岸) 밖에는. 소금 묻은 바람이 코끝으로 아려오리라. 꿈과 꿈들의 칸칸을 이어 달려온 여기는, 빛이 들기 전의 가장 어두운 땅끝이 있다. 무적(霧笛)은 울지 않는다. 그저 암암리에 전염되는 희망이 아니라면 그들 모두 어찌 여기로 몰려들겠는가.
정동진에 가고 싶다.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바다. 안개의 바다. 무명(無明)의 푸른 눈. 번들거리는 새벽 차창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의 어둑한 피안(彼岸) 밖에는. 소금 묻은 바람이 코끝으로 아려오리라. 자벌레처럼 흔들리는 엉덩이를 내보이며 열차는 안개의 몸 속으로 깊이 파묻힌다. 눈을 씻는 자리엔 녹슨 레일이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평행의 불화를 여전히 진정시키지 못한 채 뒤틀리며 무한 속으로 함께 따라 묻히고 있으리라. 돌아누운 바다와 돌아누운 산. 그 사이 작은 부유물(浮遊物)들로 인파(人波) 몇 이랑 쿨렁이리라. 여긴 언제나 임종같은 따뜻한 절망이 있다. 황량한 공동묘지 같은, 외롭고 은은한 노래가 있다. 꿈과 꿈들의 칸칸을 이어 달려온 여기는, 빛이 들기 전의 가장 어두운 땅끝이 있다. 무적(霧笛)은 울지 않는다. 그저 암암리에 전염되는 희망이 아니라면 그들 모두 어찌 여기로 몰려들었으리?정동진에 가고 싶다. 한 시대의 밤을 지나, 깜깜한 터널 속에서 노래 부르며 혹은 시를 읽으며. 등짐처럼 무거운 뉘우침을 지고, 눈물샘 주위로 말라가는 솔잎처럼 붙은 속눈썹을 씀벅거리며, 아아 문득 울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통곡하여 고백할 무엇을 생각했다. 살아온 일이란, 살아갈 일이란, 얼마나 뿌리깊은 자기에의 경멸이었던가. 따뜻하게 맞쥔 손 하나 없이, 자기의 왕국 깊숙이 어느 누구 하나 데려오지 못한, 쓸쓸한 인생. 그저 함께 쓸쓸할 수 밖에 없는 침묵의 동행들과 가끔 때묻은 소줏잔을 기울이며 어깨를 떨었다. 돌아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기억의 아물거리는 수평선. 도대체 우린 무엇이 그렇게 바쁘기만 했던가. 이제 드디어 표류하는 검은 돛배로 출렁이며 다시 출어(出漁)의 물이랑에 선다.정동진에 가고 싶다.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잊어야할 사람들을 지고 가는 길이었다. 버려야할 희망들을 지고 가는 길이었다. 희디흰 파도의 물굽이가 나를 데려갈까. 내 넋이 운명처럼 매달리던 애착과 집착을 끊어, 저 아득한 일망무제로 데려가 줄까. 애욕도 물욕도 사라진 빈 마음 한 덩이, 빈 가죽부대에 무뚝뚝하게 담아준 뒤 나를 등 떠밀까. 어쩌면 죽으러 가는 길, 아니 죽어서 가는 길이 이런 스산한 야행(夜行)이 아닌가. 저마다의 운명(殞命)으로 이어진 길. 정동진은 그래서 가끔 사람의 말을 잊게 하고 차창 밖에서 안으로 들여다보는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호젓한 솔숲 가에 나는 묻히리. 햇살 돋아나는 봉긋한 흙으로. 여기 정동진은 언제나 춥고, 목숨을 건 무엇처럼 음란하고 아름답다. 잠들지 못하는 눈꺼풀을 들어올려 저 환한 천지와 교미하는 용의 백일몽이다.
정동진에 가고 싶다. 어느 비극의 모래시계는 한 세월을 돌려 그저 낡은 풍경으로 늙어가는데 고현정소나무는 바람난 창부처럼 등창(瘡)을 지고 비스름히 굽어본다. 일출봉 횟집의 비릿한 생선들은 새벽마다 들어차는 인간들의 만선(滿船)에 목숨보시를 할 순서를 기다린다. 희망이란 늘 숨어있는 어떤 절망들을 먹어야 자라는 법. 아직도 해가 뜨려면 멀었다. 수족관 속에서 가자미눈들이, 발기한 수석(水石) 사이로 은근히 살을 부비는 남녀들을 째려본다. 저 헤픈 욕망 속에서 다시 한 세월이 잉태되리라. 정동진은 이불 속의 만세다. 태초의 경건한 순례는, 어느새 인간의 지점으로 내려와 있다. 심연을 닮은 소줏빛 취기. 구경을 나온 건, 정동진이다. 멀리 있는 우리를 당겨, 여기 불러놓고 그 퀴퀴한 풍경을 즐긴다. 갑자기 곱고 여린 한줄기 빛이 어둑한 횟집 창을 뚫고 들어온다.정동진에 가고 싶다. 정동진이 아름다운 건, 빛이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내가 머리에 이고 살아온 그 때묻은 햇빛이 아니라,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순결의 첫빛, 오로지 나를 향해 가장 먼저 달려온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빛들을 가슴 속에 가득 담아넣어 나 또한 하나의 별빛이 되리라. 단 하루 내 넋 온전히 내것이 아니었던 삶들, 이날 만이라도 내 새벽을 내가 가지리라. 그 처음의 빛부터 마지막의 빛까지 환하게 누려 이카루스가 못이룬 꿈을 이루리라. 진흙으로 만든 내 몸이 가장 따뜻해지는 이 기억은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의 포만감이다. 두 팔을 벌려 태양과 껴안는 이 시각, 문득 동행도 시간도 나도 잊었다. 오로지 빛과 먼지의 행복한 만남, 아아 이것이 노자가 말한 화광동진(和光同塵)인가. 아침에 도를 들었으니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정동진엔 늙은 지혜들이 책장 속에서 걸어나와 빛의 대장경을 아로새긴다.정동진에 가고 싶다. 아니, 다시는 정동진엘 가지 않으리라. 두번 다시 희망을 꿈꾸지 않으리라. 푸르게 적신 내 청춘의 물머리를 이제 털어내어 세상의 각박을 기꺼이 안으리라. 산사(山寺)에서 자장이 마신 약수 한 모금으로 입을 헹군 뒤, 문득 이 무한의 경건과 신성이 낯설어져서 돌아오리라. 눈을 베는 동햇물이 가슴 속에 출렁이는 동영상으로 자꾸 따라온다면 그것 또한 버리고 오리라. 정, 동, 진. 동트는 에덴의 동쪽 아득한 꿈의 세 글자를 심장에 낙인찍지도 않으리라. 내 황홀한 순례는 많은 발자국들 위에 덧입힌 하나의 땟자국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시 정동진에 가고 싶다. 정동진행(行)의 다음 문자는 그저 환한 침묵이다. 내 사랑의 가장 따뜻한 언저리. 어쩌면 오르가즘. 얼어붙는 육신의 청정해역. 거기 출렁이는 정동진으로 오라! 정동진으로 오라! 개벽하는 새벽 위로 치솟던 황금 파도의 유언들이 늘 출렁인다. 정동진에 가고 싶다. 정동진에 가고 싶다! /빈섬.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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