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X파일] '허원근 총상' 1984년 4월2일 진실은

대법, 자살도 타살도 아닌 어정쩡한 판결…죽음의 은폐, 부실한 초기수사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div class="break_mod">‘법조 X파일’은 흥미로운 내용의 법원 판결이나 검찰 수사결과를 둘러싼 뒷얘기 등을 해설기사나 취재후기 형식으로 전하는 코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무엇일까. 자녀 죽음의 소식을 듣는 부모의 모습도 그 중 하나 아닐까. 이제 어떤 아버지가 31년간 겪은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언론 뉴스를 통해 한 두 번은 접해봤을 것 같은 이름이다. 아버지 이름은 허원춘씨다. 허원춘씨보다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들인 허원근 일병이다. 그는 세상에 없다. 그것도 1984년 4월2일, 31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다. 허원근 일병이라는 이름이 언론에 널리 알려진 이유가 있다. 한국사회 ‘어두운 그림자’, 군의문사를 상징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들 죽음의 진실이 밝혀질 것처럼 보였던, 한 줄기 빛을 보기도 했던, 하지만 결국 다시 절망의 나락을 경험해야 했던 그 세월이 31년이다. 허 일병은 1983년 9월 육군 102보충대대를 통해 입대했다. 한국 남성은 병역의 의무가 있다. 허 일병도, 그의 부친도 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입대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허 일병은 불과 7개월 뒤 숨진 채 발견됐다.1984년 4월2일 오전 11시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50m 떨어진 폐유류고 뒤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대법원. 사진=아시아경제DB

군에서는 여러 차례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육군 제2군단 헌병대, 제7사단 헌병대는 1984년 4월, 1군 사령부 헌병대는 1984년 5월, 육군 범죄수사단은 1990년 2월, 육군본부 법무감실은 1995년 3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는 모두 다 ‘자살’이라는 결론이었다. 허 일병이 중대장 A씨의 가혹행위와 폭력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고참병에게 폭행을 당하자 복무의욕을 상실하고 자살을 결심했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진실일까. 그것이 허원근 일병 죽음을 둘러싼 전부일까. 만약 그렇다면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허원근 일병’ 사건이 언론의 관심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한 충격적이 내용을 발표했다.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내용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가 공개한 1984년 4월2일 사건은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전날 저녁부터 4월2일 새벽까지 중대장실에서 중대장 A씨와 중사 B씨 등이 참석하는 술자리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A씨와 B씨의 말다툼이 있었고, B씨는 내무반으로 뛰쳐나와 대기 중이던 사병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발길질을 하며 화풀이를 했다. B씨는 중대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허 일병에게 총을 쏘는 자세를 취했고, 총기오발사고가 발생해 허 일병이 탄환 1발을 오른쪽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이후 중대에서는 허 일병 총상을 둘러싼 사건 은폐를 위해 내무반 물청소를 하고 폐유류고에서 누군가 허 일병의 왼쪽 가슴 및 오른쪽 머리에 M16 소총 2발을 더 쏴 허 일병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게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 내용이다. 군의 여러 차례 발표 내용과 의문사진상규명위 발표는 단지 자살과 타살의 차이가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조직적인 은폐가 있었다는 내용과 허 일병을 옮겨서 추가로 총을 쐈다는 내용까지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허 일병 부친은 아들 죽음의 진실을 찾고자 30년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허 일병은 정말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자살을 한 것일까. 허 일병 부친은 법원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종 법적인 판단은 법원의 몫이다. 법원은 진실을 가렸을까.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부장판사 김흥준)는 2010년 2월 1심 선고를 내렸다. 1심은 “군복무 중에 망인이 타인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됐다”면서 “망인의 소속 부대에서는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두 발을 추가로 발사하고 사체를 이동시키는 등 사건을 은폐 조작했다”고 판시했다. 허 일병 부친은 법원을 통해 ‘타살’이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허 일병 부친은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행복하고 웃음 많던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순간순간이 힘든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1심은 허 일병이 타살이었으며, 당시 부대에서는 죽음 은폐 작업이 있었고, 군의 초기 수사는 부실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허 일병 부친은 늦게나마 아들 죽음의 진실을 찾은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강민구)는 2013년 8월 2심 선고를 통해 1984년 4월2일의 진실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이 사건 사고 전날 중대본부에서는 3명이 음주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건 사고와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고 음주가 금지되어 있는 곳에서 음주·소란 행위가 있었으므로 그런 행위와 이 사건 사고와의 연관성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였다고 생각되나 헌병대에서는 술자리와 이 사건 사고와의 관련성에 관하여는 일체의 조사를 하지 아니하였다.”서울고법은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해 군 수사기관의 부실수사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4월2일의 진실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내용을 판결문에 담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해서는 1심과 견해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M16 소총으로 흉부에 2발, 두부에 1발을 발사하여 자살하는 것이 드물기는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 “타살이라면 소속 부대원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큰데 망인이 평소 성실하고 착하여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타살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2심 재판부 판단의 설득력은 두 번째 문제다. 분명한 것은 1심과 다른 견해, 즉 ‘타살’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심 재판부도 군 수사기관의 부실수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자살이라고 단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심 재판부 판단 이후 허 일병 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는 몫은 이제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은 2015년 9월10일 판단 결과를 내놓았다. 대법원은 자살이라고 판단했을까, 아니면 타살이라고 판단했을까. 일단 대법원은 국가가 허원근 일병 부모에게 3억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한다는 원심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군수사기관의 현저히 부실한 조사로 피해를 봤으니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다. 허 일병 부모 입장에서 손해배상 액수가 중요하겠는가. 31년 전 4월2일, 그날의 진실에 대해 밝혀달라는 게 소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니겠는가. 대법원은 알 듯, 모를 듯한 결론을 내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살로 단정하기도 어렵고 타살로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내용이다. 대법원은 “허원근이 타살됐다는 점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들과 이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들만으로는 허원근이 소속 부대원 등 다른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내용만 보면 ‘자살’에 무게를 싣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렇다고 해 허원근이 폐유류고에서 스스로 소총 3발을 발사해 자살했다고 단정해 허원근의 타살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자살과 타살을 단정하지 못한 책임을 군 수사기관에 돌렸다. “사고 당시에만 수집할 수 있는 현장단서에 대한 조사와 부검 등이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허원근의 사망원인을 단정하기 어렵다.” 이제 허원근 일병을 둘러싼 법적인 판단은 끝났다. 결국 허원근 일병 사건은 ‘영구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군 수사기관이 사건 초기 부실수사와 은폐수사로 ‘진실’을 가렸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그래서 죽음의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얘기다. 법원은 그렇게 빠져나갔지만, 죽음의 진실을 은폐하는데 일조한 또 다른 조력자는 아닐까. 어정쩡한 판결을 내놓으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 사법부의 그러한 모습이 아들 죽음의 진실을 찾고자 한 ‘아버지의 눈물’을 부른 또 다른 원인은 아닐까.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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