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차장] 대법원은 올해 '혹독한 봄'을 경험했다. 대법관 공백 사태 때문이다. 무려 78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지난 2월17일 신영철 전 대법관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후임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검찰 출신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가 일찌감치 후임으로 지목됐다. 1월26일 박상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그러나 국회 인준은 5월6일에서야 이뤄졌다. 100일 만에 국회 인준이 이뤄진 셈이다. 국회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대법원 후보추천위원회의 '부실 추천'이 원인이었다. 박 후보자를 둘러싼 사전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축소 의혹이 제기되자 박 후보자는 물론 대법원도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국회는 야당이 표결에 불참한 가운데 '반쪽 인준'을 강행했다. 대법원은 힘겨운 시간을 마무리했지만, 상처는 고스란히 남았다. 대법원은 이미지 훼손을 경험했고, 위상도 흔들렸다. 다시 '혹독한 계절'을 경험할 수는 없다. 대법원도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반전의 계기를 고심했다. 드디어 대법원에 기회가 왔다. 9월16일 물러나는 민일영 대법관 후임 인선 작업이 시작됐다.
대법원
대법원은 '밀실 추천' 논란을 해소하고자 대법관 후보 추천을 받은 뒤 명단을 언론에 공개하기로 했다. 대법관 후보군 언론공개는 사상 처음 시도하는 일이다. 대법관 구성에 대한 국민의 다양성 요구를 실천한다니 평가할 일 아닌가. 사실 대법관은 판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검사와 변호사도 될 수 있다. 변호사 자격이 있는 대학교수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 대법관 중 13명이 고위 법관 출신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50대 남성이 대법관 선발의 공식처럼 돼 있다. 다른 대학, 다른 성별, 다른 연령대의 법조인은 대법관의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붕어빵 기계'로 찍어내듯 유사한 경력의 대법관 탄생이 반복되고 있다. 대법원은 법조계 우려를 불식하는 변화의 모습을 보였을까. 말과 행동은 달랐다.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는 후보군 중에서 3명을 추렸다. 그들은 모두 고위 법관, 50대 남성,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다. 다양성 요구를 유념하겠다는 약속은 말뿐이었다. 대법원은 '순혈주의' 폐해에 대한 법조계 지적을 경청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최종 대법관 후보로 이기택 서울서부지법원장을 낙점했다. 그의 자질과 경력이 미흡하다고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검증할 일이다. 주목할 것은 대법원이 다양화 요구를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대법원 순혈주의는 또 다른 문제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세에 순응하고 윗분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법관과 용기 있는 판결을 내놓은 법관 중 누가 대법관으로 추천될 가능성이 높을까. 대세에 순응하는 법관 아니겠는가. 순혈주의의 폐해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최근 '원세훈 사건'에서 13대0의 판결을 내렸다. 소수의견은 없었다. 법조계 의견은 팽팽하게 엇갈렸지만, 대법원은 극단적인 '인식의 쏠림' 현상을 보였다. '이력의 획일화'가 '인식의 획일화'로 연결되는 상황은 암담한 미래에 대한 예고편 아닌가. 류정민 차장 jmryu@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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