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 논설위원
며칠 전 늦은 밤에 예정에 없던 심야 골목 답사를 하게 됐다. 달빛을 받으며 서울 후암동의 뒷골목을 거닐었는데, 그곳엔 이른바 '적산(敵産)' 가옥들이 많았다. 일제 시절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남산 자락의 동네라 적산 가옥들이 적잖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 형태나 구조는 한국의 가옥들과 분명 달랐다. 그런데 일행을 이끌던 건축가의 한마디가 오랜 여운을 남겼다. '적산 가옥'이 아니라 '일본식 가옥'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는 취지였을 텐데, 내게는 그 말이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이름을 짓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게 하는 '죽비 소리'였다. 적산 가옥이라는 말은 그 속의 '적(敵)'이란 말에서부터 적대적인 감정을 담고 있다. 그것은 그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한 규정으로서는 매우 온당치 않은 것이었다. 예컨대 그날 밤늦게까지 적산 가옥 가게에서 물건을 팔고 있던 어느 아주머니의 집, 오랫동안 그 여인과 그의 가족들에 삶의 터전이 돼 왔을 집에 대한 무례한 호칭이었던 것이다. 적산이라는 말이 필요한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말을 폐기할 것까진 없다. 다만 그 말을 누군가의 집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이름으로 써서는 안 될 듯하다. 우리는 나 자신을 설명할 때 흔히 명함을 준다. 그러나 그 명함이 담고 있는 나, 그 명함의 직책이 드러내는 나는 나의 전모를 얼마나 담아내고 있을까. 명함 속의 나, 그것은 어린이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흔히 "00초등학교 0학년 0반입니다"라고 하는 것으론 그 아이가 가진 수많은 면모들의 극히 일부만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인 것과 같을 것이다. 인도 서사시 '라마야나'를 보면 인드라신의 기원이 나오는데, 그 신은 남의 여인을 탐하다가 몸이 천 개의 여성 생식기로 덮이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절대신에 탄원해 천 개의 눈으로 바뀌었다는데 여기에는 뭔가 상징이 있는 듯하다. 여성 생식기를 여성의 자궁으로 본다면 천 개의 여성 성기는 사람이 갖고 있는 천 개의 기원, 천 개의 뿌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천 개의 기원을 갖고 있는 존재는 천 개의 얼굴이 있으며 천 개의 성격이 있으며, 천 개의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존재를 바라볼 때에도 그를 단 두 개의 눈으로 보고는 함부로 뭐라 규정하지 말라는 것, 천 개의 눈으로 봐 줘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논설실 이명재 기자 promes@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