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진 디지털뉴스룸 선임기자
"저기 저 나무도 팥배나무입니다. 그런데 아래에서 본 팥배나무보다 줄기가 가늘죠?" "그렇네요. 그 나무는 둥치가 굵던데. 저 나무는 호리호리하네요. 사람이 청소년기에 키부터 훌쩍 자라는 것과 원리가 같은 것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정확히 말하면 생존을 위한 선택입니다." "뭘 선택했다는 거죠?" "나무의 성장에서 절대적인 요소가 햇볕입니다. 저 어린 나무는 저 자리에서는 주위의 어른 나무들 밑에서 햇볕을 충분히 받지 못합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청계산을 오르고 있었다.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수목에도 조예가 깊은 김 박사는 이렇게 설명하며 어린 나무가 가지를 뻗은 하늘을 가리켰다. "주위 큰 나무들이 선점한 하늘 사이에 저기 손바닥만한 빈자리가 남았잖아요. 어린 나무는 저 자리를 잡으려고 한껏 발돋움한 겁니다. 저곳에 잎을 내, 다른 나무가 가리지 않은 햇볕을 직접 받겠다는 것이죠." 이 말을 듣고 보니 속담 중 '나무는 큰 나무 덕을 못 본다'는 구절이 생생하게 이해됐다. 큰 나무 그늘에서 자라지 못하는 대표적인 나무가 소나무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소나무는 햇볕을 좋아한다. 숲이 우거져 그늘이 짙은 자리에서는 성장하지 못한다. 한반도에서 소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다른 나무의 등쌀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던 소나무가 자리를 잡게 된 계기가 기원전 10세기 전후 북방민족이 내려오면서 숲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넓히고 집 짓고 불 때려고 기존 나무를 베어낸 것이었다. 숲이 사라진 자리는 소나무가 햇살을 가득 받으며 번성하는 터전이 됐다. 고려시대에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산림이 더 파괴돼 가까운 산에 소나무가 더 많아졌다. (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산행을 다녀온 뒤 가끔 그 가녀린 나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차지한 하늘에서, 충분하진 않아도 몸피를 탄탄하게 할 만큼 햇볕을 받고 있을까. 그나마 남아있던 자리마저 다른 나무들이 그 위로 잎을 뻗어 덮어버리지는 않을까. 그 어린 팥배나무는 여름 태풍이 불어닥치면 거센 폭풍우를 견뎌낼 수 있을까. 주위의 굵은 나무는 가지와 잎이 많아 폭풍에 꺾일 위험이 큰 반면, 줄기가 낭창낭창한 그 나무는 외려 잘 견뎌낼지도 몰라. 청계산의 여린 팥배나무 한 그루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도 자라게 됐다. 백우진 디지털뉴스룸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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