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 스포츠레저 부장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자동차를 운전해 지방으로 출장 가던 길이었다. 길이 하도 막혀 무료하기에 라디오를 틀었다. 배철수(61)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그는 청취자들의 사연을 소개하다가 문득 오래 전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서울 수유리에 살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는 시내 레코드점에서 록 밴드 '딥 퍼플'의 새 음반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반을 살 돈은 있었다. 다만, 음반 값을 치르고 나면 수유리까지 갈 차비가 없었다. 배철수씨는 결국 그 음반을 샀다. 그리고는 음반을 끼고 걸어서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배철수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제게는 전축이 없었습니다." 배철수씨만큼 절절하지는 않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92년 6월, 스웨덴의 네 도시(스톡홀름ㆍ노르셰핑ㆍ예테보리ㆍ말뫼)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취재하러 갔을 때 생긴 일이다. 당시 나는 비자나 마스터처럼 외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오직 현금만 가지고 갔다. 회사에서 책정한 출장비가 충분치 않아서,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따로 준비했다. 내가 모시던 팀장께서 책을 출간하고 받은 인세를 털어 여행자 수표 한 권으로 만들어 주셨다. 그 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스웨덴에서 유럽축구를 이해했고, 이름난 축구인들을 많이 만났다. 벨기에의 기 티스(작고), 잉글랜드의 잭 찰튼(79ㆍ보비 찰튼의 형)과 나눈 즐거운 대화를 잊지 못한다. 대회는 8강전, 4강전으로 압축됐다. 지갑도 얇아져갔다. 1992년 6월22일 예테보리의 울레비 경기장에서 덴마크와 네덜란드가 준결승전을 할 때는 바닥이 보였다. 나는 경기가 열리기 이틀 전에 스톡홀름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숙소를 찾아 헤매다 예테보리 시립극장 앞을 지났다. 거기 붙은 포스터를 보고 이튿날 네메 예르비(77)가 지휘하는 예테보리 교향악단이 시벨리우스의 교향곡과 교향시를 공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입장권을 구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출장지에서 누리는 호사의 대가가 무엇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빵과 물로 며칠 버티기로 작정했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결코 무리한 행동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누구나 마찬가지로 어떠한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행동해 버려야 할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 절박함을 세상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아쉽다. 배철수씨는 그날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나와서 음반을 살 수 있었다. 아니, 먼저 전축부터 구했어야 할까. 당시에는 '야전'이라고 해서, 작은 야외용 전축이 흔했다. 바닥이 보이는 지갑을 움켜쥔 젊은 기자의 행동은 무모했다. 출장기간의 마지막 며칠은 실로 곤궁했다. 여행자 수표는 표지만 남았다. 런던을 거쳐 김포로 돌아온 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내 얼굴 같지 않았다. 프로야구 투수 장원준 선수(29)의 이적이 최근 화제가 됐다. 부산 롯데의 토박이 스타로 활약해온 장 선수는 88억원을 제시한 원 소속구단의 제안을 뿌리치고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그가 받기로 한 금액은 84억원이라고 한다. 롯데가 제시한 금액보다 4억원이나 적다. 장 선수는 왜 손해를 보면서 정든 고향팀을 떠나야 했을까. 그의 이적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시비를 가리려는 논쟁도 있다. 그러나 돈이나 정리를 떠나 이루고픈 꿈과 메워야 할 공허가 그에게 있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스포츠에는 일상의 지평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직정적인 뜨거움이 잠복해 있다. 태양이 쏟아지는 마운드 위에 우뚝 서서 운명이 걸린 투구를 수없이 해본 승부사의 선택을, 나는 존중한다. 허진석 스포츠레저 부장 huhball@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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