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의 김남길(좌)과 손예진(우)
[아시아경제 유수경 기자]배꼽 빠지게 웃긴 김남길과 칼을 들고 날아다니는 손예진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영화 ‘해적’을 연출한 이석훈 감독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화시켜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그동안 진중한 이미지로 여심을 설레게 했던 김남길과 지켜주고 싶은 청순미의 대명사 손예진은 작품을 통해 180도 변신했다. 그런데 이 변신,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이다.‘해적’은 조선 건국 보름 전 고래의 습격을 받아 국새가 사라진 전대미문의 사건을 둘러싸고 이를 찾는 해적과 산적, 개국세력이 벌이는 대격전을 그린다. 나라의 국새를 고래가 삼켜버렸다는 설정이 다소 황당하지만 여기에 재치와 풍부한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웃음 폭탄’ 영화가 탄생했다.극중 김남길은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산적 두목 장사정 역을 맡았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자 반기를 들고 산적이 된 그는 ‘송악산 미친 호랑이’로 유명하다. 그런데 무시무시하긴 커녕 엉뚱하고 능청스러우면서 심지어 따뜻하다.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듯한 백치미도 곁들였다. 김남길의 얼굴에서 코믹한 요소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해적’을 관람한 뒤 김남길의 얼굴을 보면 왠지 웃음이 나온다. 짙은 눈썹과 강렬한 눈매가 인상적이던 그는 눈에 힘을 풀고 멍한 표정의 장사정으로 확실하게 변신했다. 바다에 대해 무지하면서 행동과 의욕만 앞서는 모습이나 즉흥적으로 부하의 서열을 바꾸는 장면은 인위적이지 않은 웃음을 유발한다. ‘해적’ 제작보고회 당시 김남길은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내 성격과는 반대되는 무거운 연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 게 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주위에서 다들 ‘너의 성격에 맞는 연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고 이야기를 해주셨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의미있는 도전은 언제나 옳다. 김남길은 그것을 확실히 입증해 보였다.해적단 대단주 여월 역을 맡은 손예진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절도 있는 액션 연기로 감탄을 자아낸다. 영화에서 손예진은 남자배우보다 많은 와이어 액션을 소화한다. 평지에서 싸우는 것도 어려운데, 줄을 잡고 날아다니며 칼을 휘두른다. 자연스러운 팔의 움직임과 가벼운 스텝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해적’에서 손예진의 역할은 컸다. 여월이 남자들을 제압하는 강단 있는 성격과 리더십을 지닌 만큼 그 역시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 굳건히 중심을 잡아야 했다. 만약 여주인공이 유약하게 표현된다면 영화의 중심 축 자체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오랜 배우 생활을 거치면서 손예진은 연기력 논란을 이끌어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캐릭터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신체라는 도구를 최대로 사용하는 노력까지 더하면서 그는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뤄냈다. 미모와 현란한 검술 실력을 지닌 여자 해적단 두목은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새롭게 무언갈 만들어내야 했고, 당연히 고민도 많았다. 게다가 드라마 ‘상어’ 이후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촬영을 들어가게 돼 악조건이 겹쳐있었다. 하지만 손예진의 연기에 대한 욕심과 열정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 ‘해적’을 완성도 높은 영화로 만들어냈다. 대단주의 강인함과 책임감은 손예진 본인과도 꼭 닮아있었다.유수경 기자 uu84@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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