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유수경 기자]영화 ‘열한시’에서 김옥빈의 연기는 안정적이었다. 전작들에서처럼 음산하고 강렬하거나 펑키하지는 않았지만 고요함 속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흐름이 관객들에게 와닿았다. 흔들리는 눈빛, 톤 다운된 목소리가 신비로운 캐릭터에 힘을 실었다.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감은 빛났다.본인 스스로도 영화에 만족했다. 생각했던 것만큼 잘 나왔고, 감독에게 감사했단다. 김옥빈은 어두운 스릴러도 말랑말랑하게 다듬고, 유머코드를 잃지 않는 김현석 감독의 재능을 높이 샀다. 어찌나 감격적이었던지 VIP 시사회 때는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 역시 세월 속에서 경험치가 쌓여 이제 ‘연기의 맛’을 알아가고 있다. 이하 김옥빈과의 일문일답.▲영은을 연기한 소감?이번 역할은 힘들지가 않았다. 몸이나 감정적으로 고생한 것도 없다. 너무 쉽게 굴러들어온 복이다. 감독이 내 이미지, 목소리, 표정만 보고 캐스팅했다. 그래서 편하게 연기했다. 좋은 선배들 만나서 이야기하고 장난치고 좋은 동료 관계를 쌓았다. 정말 ‘복’인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울었다던데?숙이(신다은 분)가 죽을 때 엄청 울었다. 나도 영화를 기자 시사 때 처음 봤다. 나 말고도 다 울었다. 그러고서 한 번 봤으니까 안 울겠지 했는데 또 봐도 눈물 콧물 나오더라. 슬펐다. 너무 허무하게 죽는다. 툭 쓰러져서 바라보는데, 불길이 오르면서 롱테이크로 잡지도 않고 (감독이) 탁 끊어버린다. 그 감정, 허무함,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면 슬프다.▲‘열한시’를 촬영하면서 뭘 느꼈나?사실 내 연기를 볼 시간은 많이 없었다. 관객 입장으로 보게 된 거 같다. 같이 찍었는데 희한하게 관객처럼 봤다.(웃음) 전부 다 살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죽는다. 영화는 남은 24시간에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안 죽으려면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 너무 행복했던 사람들인데, CCTV 하나 때문에 변해간다. 처음엔 우리 영화는 왜 이렇게 답답하고 무섭냐고 짜증을 냈다. ‘CCTV는 신이냐’고 감독에게 묻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나.▲삭제된 부분도 있나?우석(정재영 분)에게 메일을 주고,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게 알고 보니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장면이 있었다. 나중에 만나고 보니까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있더라. 관계자들을 헷갈리게 하는 장면이다. 테스트 시사 때 너무 헷갈리게 한 대서 다 삭제됐다.
▲재밌었던 에피소드?아무래도 김현석 감독님이 미래를 본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 미쓰에이 수지가 지금처럼 인기가 있던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수지’를 대사에 넣었다. ‘건축학개론’이 개봉하기도 전에 쓴 거다. 물어보니까 그냥 예뻐서 쓰셨다더라. 내가 ‘예지력 짱’이라고 했다. 연기자 준비하는 내 동생도 데려올테니 좀 봐달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김옥빈에 대한 오해?말을 안 하면 얼굴이 주는 이미지가 차갑고 세 보이고 시크해 보이는 게 있나보다. 얘기하고 말하면 그냥 옆집 처녀 같다고 한다. 사실 여배우로 좋은 건 아닌 거 같다. 여우같고 똑똑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내 스스로 안 되는데 스트레스 받으면서 고치기는 힘들지 않나. 예전에는 감정적이고 솔직했는데 이젠 좀 성숙해 지기도 했다.▲지금도 ‘박쥐’(감독 박찬욱) 속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데?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거 같다. 그때의 힘과 열정이 있었다. 지금 한다면 좀 더 차분한 태주가 나오지 않았을까. 완전히 달랐을 거다. 나는 역할도 제 때 만나는 운명적인 느낌이 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못할 거 같았다가 너무 잘할 거 같은 느낌이 오는 때가 있다. 그런 시기가 올 때 연기를 하면 베스트가 나온다. ‘박쥐’같은 경우는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서 도전한 작품이다. ‘앞으로 못할게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에서 열정과 호기심을 불태웠다. ▲‘열한시’의 타임머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천 년 뒤, 이천 년 뒤...내가 죽은 이후로 가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과 근미래는 재미없을 거 같다. 내 미래를 아는 것은 재미없지 않나. 아예 다른 문명으로 가고 싶다. 그때도 인간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아니면 내가 죽는 순간으로 가보고 싶다. 외롭게 죽는지 어떻게 죽는지 그게 궁금하다. 그러면 돌아와서 열심히 살 것 같다.유수경 기자 uu84@asiae.co.kr사진=정준영 기자 jjy@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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