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12장 깽판 경로잔치(214)

처음의 쇼크에서 벗어나자 최기룡은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었다. 허벅지에서 피가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를 본 사내는 하림을 뿌리치고 한사코 일어나려고 했다.“니기미. 좋아! 오늘 저 영감하고 운학이 저 놈, 죽이지 못하면 나 사람 아니다. 개새끼처럼 죽여서 질질 끌고 다니다가 수채 구덩이에 콱 집어 던져버리고 말테니까 두고 보라구!” 입으로 온갖 저주의 말을 다 쏟아내며 일어서려는 체 했지만 그 역시 말 뿐이었다. 총 맞은 놈이 큰소리 쳐 봤자 앉은뱅이 용 쓰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하림이 꽉 잡고 있는 데다 칼 든 놈 앞에 총 든 놈 나타나듯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영감의 몇 수나 높은 돌발적 행동 앞에 처음의 기세가 꺽이지 않을래야 꺽이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처음 총소리 때처럼 공포라면 모를까, 설마하니 사람을 향해 실재로 총을 발사할 줄이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저 또라이 영감 새끼.... 내 오늘..... 지 딸년하고 오늘이 제삿날이라고 해!” 그래도 그의 입은 살아서 여전히 이를 갈며 온갖 저주를 뱉어내었다.그런 시끄러운 소동 중에도 한편, 총을 쏜 이층집 영감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벗겨진 이마 뒷머리는 하얗게 산발한 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침통한 눈빛은 무언가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영감의 어깨 너머로 계곡의 푸른 숲만 반짝이고 있었다. 그 기세에 아무도 함부로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동네 들어오는 길 저 너머 멀리 들녘 끝에서 날카로운 싸이렌 소리가 하늘 한 귀퉁이를 휘저으며 들려왔다. 아까 첫 총소리 날 때 화살코 조부장인가 하는 자가 신고했던 경찰 순찰차가 그제야 달려오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영감의 뒤쪽 골짜기 입구 길로 누군가 달려오며 숨 넘어 갈듯 다급하게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아버지....!” 이층집 여자 남경희였다. 남경희의 얼굴은 멀리서 보아도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버지.....!”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곳에 가까이 오자마자 단번에 조금 전에 그곳에서 벌어진 사태를 파악했다. 총구를 앞으로 향한 채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자기 아버지와,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허벅지에 감싸고 있는 수도 고치는 사내, 그리고 저만큼 땅바닥에 쓰러져 이마에 피를 흘리며 상체만 일으키고 앉아있는 이장 운학이, 그리고 경로잔치 천막 아래에 겁이 질린 채 솔개 본 닭새끼들 마냥 눈만 내굴리고 있는 동네 늙은이들..... 그것과 조금 전에 울렸던 총성이랑 맞춰보면 방금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다시피 엽총을 나꿔채 바닥에다 내동댕이 치고는 영감의 팔을 양 손으로 꼭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아버지!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예....? 무슨 짓을 한 거냐구요?” 그러나 영감은 여전히 무섭고 침통한 눈빛으로 앞만 쏘아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일그러진 얼굴과 굳게 다문 입은 그가 무언가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흥. 그 애비에 그 딸이라.... 이제 주인공들이 다 나타나셨군.” 그들을 바라보던 최기룡의 입에서 싸늘한 냉소가 떠올랐다.“개를 쏘아죽인 인간은 저 영감이야! 보라구, 이제 사람까지 쏘잖아? 저런 인간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 베트남에서 사람 잡던 솜씨가 어디 갔겠어?”사내는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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