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 제주 감독[사진=정재훈 기자]
[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박경훈 감독이 제주 유나이티드 지휘봉을 처음 잡은 건 지난 2010년이었다. 그는 당시 제주도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억했다. "제주 분들이 스포츠에 대해 폐쇄적이고, 뭔가 움츠러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처음엔 길에서 저를 마주친 분들도 본 체 만 체 했죠. '저 사람이 감독인건 알겠는데 딱히 아는 척 할 필요는 없다'란 반응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제주도는 맨날 꼴등'이란 생각 때문이더군요. 하다못해 전국체전, 소년체전에 나가도 제주는 늘 바닥이었으니까요." 이전까지 K리그에서의 제주도 다르지 않았다. 2006년 제주도 최초의 프로팀으로 시작했지만 성적은 초라했다. 첫 4년 간 최고 성적은 14개 팀 중 10위. 군팀 광주 상무나 신생팀 강원FC보다도 못한 성적을 거둔 적도 있었다. '프로팀이 생겼다더니 역시나 또…'란 인식도 무리는 아니었다. 변화의 기운은 박 감독 부임 후 움텄다. 사령탑에 오른 첫해 제주를 K리그 준우승에 올려놓은 것. 시즌 중반엔 3개월가량 1위를 달리기도 했다. 그 기간 TV와 신문에는 '제주, 선두 등극' '거침없는 1위 질주'라는, 제주도민들에겐 낯설기만 한 헤드라인이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우승은 놓쳤지만 김은중은 시즌 최우수선수(MVP)상을 받았고, 박 감독은 최우수감독상을 받았다. 이후로도 구자철·홍정호·송진형 등 내로라하는 스타를 배출했고, 성적에 관계없이 홈에선 유독 강한 면모를 과시했다. K리그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엄청난 변화였다."어느 샌가 아주머니나 할머니까지 먼저 다가와 아는 척을 하셨죠. '박 감독 덕분에 제주도에 축구 보는 재미가 생겼다'라고. 정말 기분 좋았죠. 지난해부터 홈팬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홈에서만큼은 재밌고, 이기는 경기를 했죠. 또 사장님부터 말단 직원까지 새벽에 도심지로 나가 경기를 홍보하고, 선수들도 지역 밀착 마케팅에 적극 나섰고요.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낳은 결과였습니다." 실제로 홈구장 서귀포월드컵경기장의 분위기는 2012년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K리그는 지난해부터 실관중 집계를 시작했다. 대다수 구단의 경기당 평균 관중이 감소한 데 반해, 제주는 오히려 50.89%(4609명→6538명)가 늘었다. 전년 대비 가장 높은 관중 증가율을 보인 팀에 주어지는 '플러스 스타디움 상'도 제주의 몫이었다. 올해도 38%가량 증가한 평균 9013명이 홈경기에 들어차고 있다. 달라진 팬심에 대한 보답은 역시 성적. 그 중에서도 우승이다. 아직 제주 클럽하우스의 트로피 진열대는 썰렁하다. 유공축구단-부천SK 시절 정규리그 우승 1회, 리그컵 우승 3회로 받은 게 전부다. 냉정히 말해 당장 K리그 클래식 우승을 바라보긴 어렵다. 포항·울산·서울·전북 등에 비해 선수층이 두텁지 않은데다, 연고지가 섬이란 특수성 탓에 여름이나 원정경기에 따른 체력 소모 또한 크다. 상위 스플릿 진입(7위 이상) 정도가 가시권 목표다.
박경훈 제주 감독[사진=정재훈 기자]
반면 FA컵은 다르다. 토너먼트의 단기전 승부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 무엇보다 우승팀에겐 내년도 AFC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이란 혜택이 주어진다. 제주는 현재 2013 하나은행 FA컵에서 부산 아이파크, 전북 현대, 포항 스틸러스와 함께 4강에 올라 있다. 올해를 포함, 지난 4년 간 세 차례나 대회 준결승에 오른 단골 손님이다. 다만 앞선 두 번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2010년과 2012년 모두 추첨 결과 원정으로 준결승전을 치렀고, 각각 수원 블루윙즈와 포항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일단 홈에서 경기를 치른다. 제주는 지난 4년 간 FA컵 6차례 홈경기에서 전승을 거뒀다. 특히 올해는 32강전부터 8강까지 모두 안방에서 뛰는 행운을 얻으며 건국대-수원-인천을 차례로 꺾었다. 4강전 상대는 다름 아닌 디펜딩 챔피언이자 지난해 준결승 상대였던 포항. 설욕의 의미까지 갖고 있다. 박 감독은 21일 FA컵 미디어데이에 참석해 "제주 지휘봉을 잡은 이래 세 번째이자, 처음으로 홈에서 치르는 준결승전"이라며 "지난해 포항에서 패한 기억도 있는 만큼 이번엔 꼭 승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왕이면 결승전도 홈에서 치렀으면 좋겠네요"라며 "홈 관중 2만 명이 넘으면 오렌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겠다고 했는데, 결승전에 2만 관중이 들어찬 가운데 우승까지 차지해 염색을 하고 싶어요"라고 웃어보였다. FA컵 우승은 또 다른 도약을 약속할 수 있다. 박 감독은 지난 1월 전지훈련 당시 ACL 우승에 대한 원대한 꿈을 밝혔다. "일단 ACL에 나가면 모기업에서도 축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지 않을까요? 또 포항이나 성남도 최상급 전력으로 ACL을 우승한 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늘 스포츠는 꼴찌였던 제주도가 아시아 정상에 오른다면, 제주도민 분들에게 엄청난 자부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행복하네요. 허무맹랑한 걸까요? 그래도 '꿈은 이루어진다'잖습니까." 전성호 기자 spree8@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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