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습니다.//신호등은 어서 건너라고 삐리릭 삐리릭 재촉하는데/먼저 건넌 소녀가 문을 연 커피숍에서 왈칵 음악이 쏟아지는데/열아홉인지 스물인지 아직 소녀같은 그녀는 음악 속 딴 세상으로 사라지는데/거리로 쏟아져 나온 음악들은 물고기들처럼 배때지를 뒤집고 팔닥대는데//횡단보도 이 편에서 나 혼자 비를 맞으며 저쪽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윤석산의 '횡단보도 앞에서 - 환지통.7' 중에서■ 횡단보도는 길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늘 길이 아니라, 잠깐 길로 열렸다가 다시 큰 길에 제 몸 모두를 내주는 길이다. 횡단보도는 줄 몇 개로 표시해놓은 약속이며 신호등이 허용한 짧은 시간에만 길이 될 수 있는 잠정적인 보도이다. 횡단보도가 길이 될 때 차도는 잠깐 길이 되는 일을 멈추고, 차도가 길이 될 때 횡단보도는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길을 건너는 일은, 길의 길의 대치와 충돌을 느끼는 일이다. 많은 교통사고들은 횡단보도의 잠정성 때문에 일어난다. 차도가 열리고 보도가 끊어졌을 때, 강의 양쪽처럼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생긴다. 피안의 커피숍에서 음악들이 쏟아져나오는 풍경. 거기 소녀가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데, 음악들은 길 위에 비오는 날 물고기처럼 배를 뒤집고 팔딱대는 이미지. 이 환상의 피안을 바라본다. 차안과 피안이 끊긴 시간. 잘린 팔다리의 없는 부위가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아파오는 환지통(幻肢痛)처럼, 끊겨있는 길이 쓰라려온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편집국 이상국 기자 isomis@ⓒ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