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를 깐 테이블 위엔 음료수와 과자 등이 놓여 있었고, 천장엔 커다란 선풍기가 풍차처럼 매달려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오토바이의 소음과 무더운 바람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부겐벨리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오후 늦게 시작된 한-베트남 문학인 세미나는 시종 진지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하림은 동희형과 나란히 그들 뒤, 벽을 따라 놓여진 의자에 방청객처럼 앉아서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국 측에선 <한국문학에 나타난 베트남 전쟁>이란 주제로 어떤 젊은 평론가가 발표를 했고, 베트남 측에선 <베트남 민족해방전쟁과 베트남 문학>이란 주제로 베트남의 젊은 문인이 발표를 했다. 간간히 시도 읽었는데, 머리가 하얀 베트남 시인이 나와 읽은 시는 전쟁 중 폭격으로 구덩이가 파졌는데, 살덩이가 흩어진 그 구덩이에 비가 오고 물이 고여 연꽃이 피어났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빼빼 마른 박철이란 시인이 나와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라는 자작시를 읽었을 때는 간간히 웃음이 터져나왔다. “막힌 하수구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려다/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에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나는 나무 한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아내의 심부름을 방기하고 노임으로 갖다 주라는 돈으로 도중에 비 핑계로 슈퍼에 주저앉아 술을 마시거나, 화분을 사는데 써버린 시인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세미나는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자 다소 무겁고 침울한 목소리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이며, 과거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는 식으로 결론을 맺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들 숙제를 마쳤다는 기분이었는지 술이 곁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뒤늦게 키가 껑충하고 얼굴이 까만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한국에서도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 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반레 씨라고 했다. 빼빼 마른 몸에 헐렁한 옷을 걸친 그는 첫인상부터 매우 겸손하고 소박하게 보였다.“저 양반 저래 보여도 대단한 사람이야.”동희형이 말했다.“나도 방아무개란 작가의 작품에서 읽었어. 그는 북 베트남 닌빈이란 아름다운 시골마을 출신인데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대. 우리식으로 하자면 소년병이었던 셈이지. 호치민 루트를 타고 사이공을 향해 3개월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함께 입대했던 삼백명은 거의 다 죽고, 자기를 포함해 다섯명만 남았더래. 반레라는 이름도 원래 자기 이름이 아니고,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되지 못하고 죽은 자기 친구의 이름이래. 대단하지?”동희형은 벌써 감동을 한 목소리였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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