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까지 이야기 한 남경희는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갑고 당당하던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슬프고, 외로워 보였다.“혹시 종교를 가지고 계신가요?”그녀가 물었다.“아뇨.”하림이 대답했다. 그녀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사실을 말하자면 하림 역시 한때는 열심히 교회에 나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발을 끊은 지 오래였다. 한국 교회는 예배당이라 불리던 시절이 가장 기독교다웠다. 시골 마을 언덕 위에 세워진 예배당은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모두에게 꿈과 위안을 주었다. 크리스마스 때면 근처 동네 아이들이 몰려가, ‘탄일종이 울리네, 은은하게 울리네, 저 깊고 깊은 산 속, 오두막에서도 탄일종이 울리네.’ 하는 노래를 부르고, 과자와 빵을 얻어오고는 했다. 그곳엔 언제나 똑같은 옷을 입은 소박하고 겸손한 늙은 목사님이 계셨다.그때는 스스로 빛과 소금이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울 와서도 70년대 산동네 골목길에 있던 교회 목사님들은 스스로 빛과 소금이 되어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처럼 외제차를 타고 거드럼을 피우며 제왕처럼 행세하는 목사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군사 정권의 독재가 극악하게 치달릴 때도 맨 먼저 감옥으로 간 이들도 그들 가난한 목회자들이었다.그 시절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있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루어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그 노래를 부르며 수많은 목회자들이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갔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암흑기, 민주화로 가는 긴 장정을 이들 목회자들 없이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리고 타락하였다.빛은 빛을 잃었고, 소금은 그 맛을 잃어 길거리에 버려졌다. 민주화의 길고 긴 고난 동안 침묵하고 무임승차한 보수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대형화와 성장이 지상의 목표가 되었다.정의로운 하나님, 갈릴리 호수가의 가난한 백성들 속에서 넝마를 걸친 채 말씀을 전하던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들이 섬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예수를 핍박해 십자가에 매단 제사장과 같이 거들먹거리며, 헤롯왕을 위해 기도하고 부자들을 위해 황금성전을 지었다. 장로 대통령이 나왔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온갖 비리와 부패에도 늘 함께 하였다. 더 이상 가시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시던 예수는 없었다.“지금 예수가 온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또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말걸세.”언젠가 개동철학자 똥철이 말했다.“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간의 형제들이란 소설에도 나오지. 다들 예수가 재림하자 그가 예수라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척 감옥으로 보내버리잖아. 그리고 제사장이 밤에 혼자 가만히 내려가서 말하지. 여긴 당신이 올 곳이 못 됩니다. 여긴 그저 우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세요, 라고 말이야. 아마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도 그럴걸세.”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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