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단어를 놓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직업병 증세의 하나다. '거품'이란 말에서 맥주회사 직원이 신선도를 떠올린다면 환경운동가는 오염된 하천을, 경제기자라면 너무 올라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주식 가격이나 집값을 연상할 것이다 '피부'란 단어도 경제와 만나면 뜻이 오묘해진다. '피부경기'나 '피부물가'는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경제의 한 모습이다. 피부경제는 예민하다. 소소한 움직임에도 쉽게 상처받는다. 하지만 본질은 뜻밖에도 강골이다. 공식 통계나 정책당국자의 립서비스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체험적 소신과 저항 또는 불신이 바탕이다. 예컨대 '피부 물가'는 통계청이나 한국은행에서 내놓는 공식 물가통계에 맞서는 장바구니의 소리다. 통계상 물가는 1%대 오름세를 이어간다. 너무 낮아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주부의 으뜸가는 소망은 여전히 물가 안정이다. 왜 그런가. 통계는 서민의 애환을 읽어 내지 못한다. 저물가를 실감하기에는 이미 너무 올라 있다. 교육비에 치여 더 줄일 곳도 없다. 뛰는 전셋값에 은행 돈을 또 빌린 사람도 있다. 하루가 힘겨운 서민의 입장에서 '1% 저물가'라는 통계는 탁상 위의 공허한 숫자일 뿐이다. 어디 정부가 발표하는 통계뿐인가. 국민행복과 소통을 앞세운 정부이지만 서민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경제관료의 '그들만의 언어'는 과거와 달라진 게 없다. 서민과 다른 특이성 피부를 가졌을까. 최근에도 그들의 '관료스러운' 언행은 이어졌다. 금융기관 낙하산 인사와 관치 논란이 한창일 때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좋은 관치도 있고 나쁜 관치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나쁜 관치'를 강조하려고 그런 어법을 쓴 것은 분명 아니다. "관료도 전문성이 있다면 금융지주 회장을 할 수 있다"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의 말도 그렇다. KB금융지주 회장 후보로 모피아(기획재정부 출신) 인사가 유력하게 떠올랐을 때다. 그가 전하는 은근한 메시지의 뜻은 삼척동자도 읽을 수 있다. 며칠 전 금융전문가 143명이 모여 '관치금융의 뿌리 모피아는 금융 감독에서 손 떼라'고 요구한 것도 그런 제 식구 감싸기 식의 행태가 불씨라면 불씨다. 국회 가계부채 청문회에서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위기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규모나 증가 속도를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1000조원 가계부채라는 숲을 가리킨 말이지만, 숲 속에는 위태위태한 개개인이 숱하다. 내가 위기인데, 위기가 아니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들의 피부에 와 닿는 따뜻한 언어는 찾을 수 없었을까. 말과 통계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도 체감경제와 어긋날 때가 많다. 얼마 전에 나온 하반기 경제운용방향은 민생회복 가시화를 핵심 과제에 올리고 구체적으로 3%대 성장회복을 내걸었다. 연간 경제성장률을 2.3%에서 2.7%로 올려 잡았다. 하반기에는 3.4% 안팎의 성장을 하겠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30만명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목표는 가상하지만, 글쎄다. 성장회복의 근거는 세계경제 회복과 정책효과의 본격화다. 현실은 어떤가. 서민의 주머니는 비었고 기업은 투자를 망설인다. 한여름 폭염에도 피부경기는 냉랭하다. 나라 밖 사정도 심상치 않다. 세계 경제는 출구전략의 가시화로 요동친다. 추경 편성 외에 실효적 정책은 눈에 띄지 않으니 믿음보다는 썰렁한 말을 듣는 느낌이다. 경제관료라면 정책과 언행이 왜 서민의 가슴에 울림을 주지 않는지, 오래된 직업병은 없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좋은 관치를 말하기 전에 선배 일자리 챙기는 낡은 의리부터 청산해야 한다. 때로는 탁상의 고고한 통계표를 던지고 서민의 창백하고 예민한 피부를 직접 만져 보라. 박명훈 주필 pmhoo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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