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1993년 2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하자마자 시내에 있는 전자제품 매장을 찾았다. 매장엔 GE, 소니, 파나소닉 등 미국과 일본 제품들이 가득했지만 삼성전자 제품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제품을 발견한 이 회장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진열대에 서지도 못한 제품, 경쟁 제품보다 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 바로 그것이 당시 삼성전자의 위상이었다.화끈거리는 얼굴을 뒤로 한 채 호텔로 향한 이 회장은 한국에 있는 삼성전자 사장단을 모조리 호출했다. 이 회장은 호텔의 대형 행사장을 통째로 빌린 뒤 현지에서 처음으로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를 열었다. 이 회장의 평가는 신랄했다. 경쟁사 대비 제품의 질이 크게 떨어지는데도 위기의식이 없는 삼성전자 경영진에게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 관계자는 당시를 회상하며 "거의 모든 제품에 대해 이건희 회장이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면서 "성능은 물론이고 제품의 품질도 좋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당시만 해도 품질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분위기가 만연해 회장이 이에 대로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20년이 지난 현재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는 '경쟁제품 비교전시회'로 명칭을 바꿨다. 그 사이 삼성전자의 제품이 선진제품이 됐고 경쟁사 제품은 비교 대상이 된 것이다. 신경영 20주년을 맞아 선진제품이 경쟁제품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 회장의 본질적인 고민이 있다. 더 이상 경쟁사의 선진제품을 발 빠르게 쫓아가는 '패스트 팔로워(추종자)' 전략으로는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탓이다. 이제 삼성전자는 자사 제품을 경쟁제품들과 비교하며 어떻게 하면 앞서 나갈지 '퍼스트 무버(선도자)'의 역할을 자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를 경쟁제품 비교전시회로 바꿈으로써 또 다른 위기의식을 갖게 만든다"면서 "이제 쫓아갈 제품이 없다는 의미 보다는 선진제품을 쫓아가기만 해선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말했다.그래서 신경영 20주년을 맞은 경쟁제품 비교전시회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과거 20년 숨 가쁘게 경쟁사의 선진제품을 쫓아가며 지금의 위치를 이룰 수 있었지만 이제는 먼저 시장을 열어가지 않으면 더 이상의 성장은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뭍어 있는 것이다. 이 회장은 지난 수년간 강도 높은 경영혁신을 강조해왔다. 높아진 삼성전자의 위상에 대해 고민했고, 튀어나온 못이 돼 경쟁사들의 공공의 적으로 자리 잡은 이후의 생존을 고민했다. 지난 2011년 이 회장은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석해 ▲소프트기술 ▲S급 인재 ▲특허 확보 등 3가지를 삼성전자가 직면한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2년이 지난 현재 이 회장의 핵심 과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삼성전자는 변하고 있지만 아직 선도자를 자처하기에는 이르다. 이 회장이 수년전부터 끊임없이 '위기'를 강조하고 올해 초 3개월 가까이 해외에서 경영구상에 나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명진규 기자 aeo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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