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 - 4장 낯선 사람들 (68)

그런데 길목수퍼엔 기대하던 하소연이는 없고, 대신 얼굴이 약간 흉측하게 생긴 늙은 여자가 카운터 등의자에 엉덩이 끝을 엉거주춤 붙이고 앉아있다가 하림을 맞았다. 음료수 냉장고 위에 놓인 낡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중인가 보았다. 하림을 째려보는 눈빛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하긴 아침 일찍 한 손에 물통을 들고 들어온 낯선 젊은 사내가 누구인지 의심스럽기도 할 것이었다. ‘저 늙은 여자가 바로 하소연이 말했던 바로 그 사촌 언닌가 하는 사람인가 보군. 풍을 맞아 반신을 못 쓴다더니.... 얼굴마저 이지러졌어. 암튼 고약해 보이는구먼.’ 하림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약간 당황한 기색을 지으며 서있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저어기, 안녕하세요? 혹시 하소연 씨 있어요?”하고 제법 상냥스런 표정으로 물었다.“소연이....?”늙은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예. 혹시 소연 씨 사촌언니 되시나요?”“그렇수만.”여전히 퉁명스런 어투였다.“아, 그렇군요. 그렇지 않아도 말씀 들었어요. 토란국 잘 먹었어요.”“토란국....?”늙은 여자가 뭔 소리냐,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림은 순간 아차, 싶었다. 어제 소연이 자기 사촌언니가 보냈다고 한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을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디가 예쁘다고 토란국 먹어라 보냈을 리가 만무했다.“아, 아니예요.”하림은 얼른 부정을 하고는,“저어기, 전, 저 밑에 윤재영 씨 화실에 와있는 사람입니다. 수도가 얼어서 물 좀 얻어갈까 해서요.”하고 변명하듯이 말했다.“흠. 그리고보니 새로 왔다는 작가 선생이구먼.”그제야 늙은 여자가 말투를 조금 눅여서 아는 채 하고 받아주었다. “물 뜨려면 저 뒤로 가서, 수도가 있을거요. 거기서 받아가슈.” 그리고나서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텔레비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림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까닥하고는 물통을 들고 수퍼 뒷문으로 나갔다. 뒷문 밖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고, 수도가 있었다. 수돗가 석류나무 아래엔 오랫동안 씻어주지 않아 유기견처럼 보이는 흰 털의 강아지 새끼 한 마리가 묶여 있다가 딴에 그래도 개라고 하림을 보고는 낑낑거리며 용을 쓰는 시늉을 했다. 축 늘어진 개목걸이가 땅에 끌렸다.수도를 틀자 쏴하는 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물이 쏟아져나왔다. 하림은 쏟아져나오는 물에 물통을 몇 번 가시고, 먼지 묻은 바깥 부분도 한번 씻어낸 다음 물을 받았다. 그리고나서 물통에 물이 차는 동안 혹시 하소연이 안에 없나, 하고 눈으로 여기저기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하긴 아직 이르다면 이른 아침이었다. 이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면 잠 많은 이십대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지금 방 안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렇게 기웃거리는 자기가 우습기도 했다. 언제 봤다고.... 후훗.그래도 철없이 재잘거리며 웃던 노랑머리 그녀가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시골에서 자기보다 젊은 여자아이를 만난 것만 해도 우연치고는 아름다운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그녀의 사촌언니라는 저 할망구 눈빛을 보니 여간 의심 많은 늙은이가 아니겠던데.... 조심해야겠던걸.....쏴아거리며 차오르는 물통을 바라보며 하림은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였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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