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박성훈은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프로에서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련을 겪었다. 2008년 삼성과 히어로즈의 트레이드 무산이다. 그는 장원삼과 맞교환돼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한국야구위원회(KBO)의 트레이드 승인 거부로 일주일 만에 삼성에 복귀했다. 야구규약 91조에 명시된 공시 여부를 두 구단 모두 지키지 않아 발목을 잡혔다. 당시 박성훈은 “선수단에 잘 적응하고 있었는데 당황스럽다.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라며 혼란스러워했다. 장원삼도 한동안 핸드폰을 꺼놓은 채 외부와의 연락을 피했다. 이듬해 둘의 성적은 좋을 리 없었다. 장원삼은 4승 8패 평균자책점 5.54로 데뷔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박성훈도 1패 평균자책점 5.17을 남기는데 그쳤다. 1년여 뒤 둘은 정식 트레이드 절차 속에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그런데 히어로즈로 발걸음을 옮긴 선수는 한 명 더 있었다. 2006년 삼성에 입단한 투수 김상수다. 박성훈은 인터뷰 전까지 그에게 미안해했다. 자신의 추천으로 함께 넥센에 건너왔다고 믿은 까닭이다. 사실은 달랐다. 추천은 참고사항에 불과했다. 구단 관계자는 “박성훈은 김상수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둘 모두 철저한 분석을 통해 영입됐다고 봐야 옳다”라고 설명했다. 다음의 대화는 박성훈이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전에 이뤄졌다. 다음은 박성훈과의 일문일답장원삼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넥센 유니폼을 두 번 입었다. 2008년 불발됐던 이적을 포함한 질문인가. 그렇다. 두 번 모두 이적을 예상했나. 2008년과 2009년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009년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을 것 같은데.(고개를 가로저으며)전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2008년 트레이드 승인을 거부해 물 건너갔다 여기고 있었다. 삼성 구단으로부터 이적 소식을 따로 전달받지도 못했다. 언론에 보도되기 전 매니저로부터 연락이 오기 마련인데, 인터넷 뉴스를 통해 소식을 처음 접했다.당시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휴가가 끝나가던 12월 말이라서 대구에 일찍 내려와 친한 친구 집에 머물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포털 사이트를 열었는데 검색어에 내 이름이 있었다. ‘설마’했는데 나였다. 멍했다. 그렇게 컴퓨터 앞에서 정신을 놓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매니저였다. 트레이드가 됐다고 했다. 상당히 곤혹스러웠겠다. 그렇진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네, 알겠습니다’라고 전화를 끊은 뒤 바로 짐을 꾸렸다. 2008년에는 삼성 구단으로부터 먼저 연락을 받았나.그렇다. 경산에서 마무리훈련을 하는데 구단 관계자가 잠시 대화를 하자고 했다. 따라갔더니 그 분이 그러더라. “넥센의 장원삼 알지? 그 친구랑 너랑 1-1 트레이드가 됐어”라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국내 최고의 왼손투수가 나랑 맞교환될 리가 없지 않나. 그런데 현금이 포함됐다고 하더라. 적잖은 충격에 휩싸였을 것 같은데.물론이다. 솔직히 가기 싫었다. 낯선 곳으로 간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처음 프로에 데뷔한 삼성에서 오래 뛰고 싶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유니폼을 갈아입게 돼 구단에 많이 서운했다. 훈련장에 함께 있던 동료들도 적잖게 놀랐겠다.(정)현욱이 형, (안)지만이, (오)승환이 등 많은 동료 투수들이 안타까워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숙소로 들어가 짐을 챙기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트레이드 소식을 받아들였다.
장원삼
당시 넥센에 친한 선수가 한 명도 없었나. 지금은 은퇴한 (이)정호와 친하게 지냈다. 삼성에서 함께 뛰었던 건 아니다. 내가 입단했을 때 정호는 심정수, 박진만 선배의 FA 이적에 따른 보상선수로 현대 유니폼을 입었다. 한양대 4학년이던 2004년 여름, 삼성 선수단과 함께 훈련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고생하며 친분을 쌓았다. 동갑내기라서 대화가 참 잘 통했다. 룸메이트로 낙점됐겠다. 당시 선수단이 제주도에서 마무리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한 방을 쓰게 됐다. 딱 일주일 동안. KBO의 트레이드 승인 거부 때문인가. 그렇다. 대구에서 제주도로 넘어가 일주일을 보낸 뒤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넥센으로 떠나기 전 동료들이 꽤 거창한 송별회를 해줬는데, (윤)성환이 형이 대뜸 그러더라. “돈 내놓아”라고(웃음). 물론 농담조였다. 동료들을 다시 보니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편안했다. 한편으론 어수선한 느낌도 있었다. 몇몇 동료들이 그랬다. “야구인생 참 신기하게 꼬였다”라고.정확히 두 번 꼬인 듯하다. 1년여 뒤 다시 넥센으로 이적했다. 트레이드를 예감했나. 제주도를 떠나기 전 정민태 코치가 “내년에 다시 이적이 추진될 것 같으니 운동 잘 하고 있어”라고 했다. 그 말에 ‘다시 올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태 코치가 신경을 많이 써줬다. 내가 삼성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운동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종종 전화를 줬다. 넥센을 다시 찾았을 땐 혼자가 아니었다. 김상수와 함께 이적했다.상수에게 정말 미안하다. 사실 내가 데려왔다.그게 무슨 말인가. 이적 전 정민태 코치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괜찮은 투수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에 상수를 지목했다. 김상수도 사실을 알고 있나. 얼마 전 크게 마음을 먹고 이야기했는데, “괜찮다”라고 하더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맙다”라고까지 했다. 지금은 나를 다시 원망할 것 같다. 뜻대로 야구가 잘 풀리지 않으니까.
박성훈(왼쪽), 김상수(사진=넥센 히어로즈 제공)
사실 KBO의 트레이드 승인 거부에 따른 최대 피해자는 당신이었다. 이장석 대표가 직접 이를 밝힌 적도 있었고.피해를 입었다고 느낀 적은 없다. 글러브를 내려놓게 된 건 아니지 않은가. 이적 당시 주위에서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며 나를 위로해줬는데 솔직히 그런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어느 구단을 가든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려면 잘 던져야 하고. 내 자신의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의 세계란 본래 냉정한 법이니까. ‘야구 불모지’나 다름없는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어떻게 야구와 인연을 맺었나. 노암초교 재학 시절 선생님의 추천으로 하게 됐다. 특별활동 시간에 무얼 할까 고민하는데 선생님이 야구부에 가보라고 해서 처음 글러브를 만져봤다. 거기서 나오는 빵과 우유를 맛있게 먹으며 즐겁게 시작했다. 야구에 대한 관심도 있었을 텐데. 프로야구에는 없었던 것 같다.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연고지가 서울이라는 사실도 강릉고 진학 뒤에야 알았으니까. 강원도를 연고로 하는 구단이 현대 유니콘스라는 점도 그때 알게 됐다. 강원도가 ‘야구 불모지’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냥 지역별로 야구하는 학교가 고르게 분포돼 있는 줄 알았다. 그런 조건에서 야구를 잘하게 된 비결이 있다면.원주고 지휘봉을 잡고 계신 강영수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강릉중앙초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김상선 코치님도 많은 도움을 주셨고. 언제부터 투수로 자리를 잡았나.한양대에 진학하면서부터다. 투수를 할지 야수를 할지 고민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 나를 투수로 고려하고 뽑아 마음을 굳혔다.강릉고 시절 타자로도 꽤 좋은 성적을 남겼던데. 괜찮은 편이었지만 팀이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3학년 때 성적이 1무8패였던 걸로 기억한다. 매 경기 거의 3번 타자로 출전했다. 키는 183cm로 큰 편이었지만 몸무게가 60kg 후반이었다. 마른 체형이어서 파워가 다소 부족했다. 은사님들이 2, 3개월 동안 살을 붙이라며 일부러 쉬게 해줬는데도 체중이 불지 않았다. 라면을 5봉지씩 먹어도 그랬다. 한양대에 진학해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한 뒤에야 체중이 조금씩 늘었던 것 같다.
강원도에서 야구를 해 힘든 점은 없었나.연습경기를 많이 치를 수 없었다. 최근 춘천고 야구부의 해체로 강원도에 남은 학교가 강릉고, 원주고, 속초상고 세 곳뿐이다. 강원도 후배들의 고생이 클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다른 학교에서 많이 찾아줬으면 한다. 최근 학교마다 인조잔디를 설치하는 등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올해 좋은 성적을 거둬 부모님이 꽤 기뻐하실 것 같다. 아버지가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뒷바라지를 하느라 그간 고생이 많으셨다. 경포대에서 ‘언덕마루’라는 펜션을 운영하시는데, 일을 하시면서도 늘 아들을 뜨겁게 응원하셨다. 내가 프로에서 대성하길 바라는 마음에 지금도 매일같이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신다. 어머니에게 해드리고 싶은 게 많겠다.해외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하셨는데 이번에 연봉 인상을 이뤄 내년에 꼭 보내드리고 싶다. 사실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경포중 진학 이후 야구장 합숙으로 집에서 떨어져 지내야 했고, 프로생활을 하는 지금도 형편은 다르지 않다. 하루빨리 어머니와 형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가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싶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물론이다. 올 시즌은 목표가 없었다. 그냥 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원래 목표를 두고 연습하는 편인데 개막 이후 좋은 결과가 거듭되다보니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그래서 내년이 더 기대된다. 아직 시즌이 끝난 건 아니지만 1군에서 많은 걸 배운 한 해였다. 앞으로 팬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 기대해 달라. 이종길 기자 leemea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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