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乙이 된 삼성이 얻은 것은

"저는 절대 GAP를 입지 않습니다. 갑(甲)만 생각하면…" 예전에 만난 대기업 협력업체 사장이 불쑥 던진 말이다. 예기의 요지인 즉 제조ㆍ유통일괄화의류(SPA)인 GAP 브랜드의 한국식 발음이 갑인데 을(乙) 입장인 협력업체로서 GAP 브랜드만 봐도 갑이 생각나 멀리한다는 것이다. 갑에 부품을 공급하며 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을이지만 납품가 인하 압박이나 경영간섭 등을 감안하면 결코 편치 않은 사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갑을(甲乙)이란 계약서 상에 계약 당사자들을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관행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약자를 갑, 반대의 경우를 을로 칭하면서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갑은 을에게는 가깝고도 먼 사이다. 상호 협력관계여야 하지만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의 횡포에 을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가 약자편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갑은 횡포를 부리고, 을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으로 고착됐다.  그러다보니 을을 많이 둔 갑에게 비난이 많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것이 국내에서 을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삼성그룹에 대한 국민들의 반정서다. '삼성 공화국''삼성왕국' '이건희 제국'이라는 단어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최근 들어 이같은 기류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애플이 특허소송을 제기하면서 만년 갑인줄 알았던 삼성이 을 신세가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삼성은 애플과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경쟁관계이지만 아이폰에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회사다. 애플이 갑이고 삼성이 을이다.  갑 애플과 특허소송을 벌이고 있는 을 삼성은 갑이 을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공격하고 있지만 갑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자극적인 말을 아끼며 조심스런 행보를 하고 있다.  삼성이 애플의 횡포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 국민들의 반 삼성 정서를 다소 누그러뜨린 것으로 보여진다.  정확히 얘기하면 삼성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갑인 애플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면서 삼성으로서는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특히 미국 법원의 허무맹랑한 판결로 삼성이 엉뚱한 피해를 입었다는 분석이 제기돼 억울함에 무게가 실리면서 삼성에 대한 반감정은 약자에 대한 옹호론으로 바뀌고 있다. 삼성으로서는 애플의 소송이, 미국 법원의 판결이 심화되고 있는 반 삼성 정서에 대한 구세주 역할을 한 셈이다. 삼성그룹 사장단은 지난 2005년 반 삼성 감정이 심화되자 회의를 갖고 해소 방안을 논의 했었다.  당시 사장단은 '1%의 반대세력도 포용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사회 각층의 목소리를 더 귀담아 듣고, 협력업체 등과의 상생경영과 소외계층에 대한 나눔경영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답이 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반 삼성 정서는 오히려 심화됐다. 삼성 사장단이 찾지 못한 답을 애플이 준 셈이 됐다. 그 답이 갑을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삼성 스스로 얻은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플과의 소송은 한시적인데다 언제, 어떻게 정리될 지 모르는 상황이다. 을로서 누리던 수혜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삼성이 주목할 게 있다. 수천억원의 사회공헌이나 협력업체 지원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해법도 찾았다. 애플과의 갑을관계에서 얻은 교훈이 우리 국민들의 친 삼성정서 기조 형성에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노종섭 산업부장 njsub@<ⓒ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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