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리더십 키워드 2-세종장영실.정인지 등 인재 두루 발탁집현전, 37년간 100명 학사 배출재임 동안 1800회 넘는 경연(經筵)관료수준 높이고 참여의식도 키워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관원이 직무에 적당한 자라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질 것이다." 실록에 남겨진 세종의 이 같은 언급은 그의 인재경영 원칙을 그대로 드러낸다. 조선시대 세종은 인재를 발탁하고 활용하는 데 가히 천재적인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유달리 명재상과 뛰어난 학자, 신료들이 많이 배출됐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관노인 장영실이 종 3품의 벼슬에 오른 것 역시 이 같은 세종의 인재등용 원칙 덕분이다. 장영실은 세종에게 발탁돼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해시계, 물시계를 만들었고 조선시대 과학의 선구자로 우뚝 섰다. 무관 출신의 공학자 이천과 정인지, 정초, 김담 등도 세종이 발굴한 대표적 인재다. 세종 2년에 만든 집현전은 자신의 비전을 이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현전은 이후 37년간 100여명의 학사를 배출하며 세종의 '싱크탱크'로서 인재양성, 정책자문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세종은 폭넓게 인재를 썼다. 허조는 법가, 황희는 유가, 맹사성은 도가 사상을 지닌 신하였다. 그는 "당대의 인재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사회에 기여하게끔 하라"고 말한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원이 있더라도 이를 알아보는 경영자의 눈과 지원이 없다면 능력은 결코 발휘될 수 없다. 시대는 다르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경영자의 눈, 인재를 키우는 경영자의 마인드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종은 용의주도하게 인재를 끌어 모으는 재능을 갖고 있었고, 또한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인재들을 하나하나 만나 확인하려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물론, 보상시스템에서도 한 시대를 앞서 나갔다. 세종의 국가경영을 뒷받침한 또 다른 사상은 바로 '위민', '애민'이다. 그는 1418년 즉위교서를 통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펴겠다(施仁發政)"고 밝혔다. 이 같은 민본 사상은 단지 구호가 아닌 그의 국정 전체에 일관되게 보여진다. 그는 늘 왕으로서 '소명'을 갖고 백성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고민했다. 훈민정음을 비롯한 수많은 발명품은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어진마음으로부터 출발했다. 세종은 어떤 사안에 대해 보고받을 때면 늘 '백성에게 유용한 일인가'를 묻곤 했다.수많은 발명품 중 훈민정음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을 그대로 드러낸 창조물로 첫 손에 꼽힌다. '어린 백성이 알리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이를 글로 옮기지 못하니,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매일 사용하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창제문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던 세종의 마음과 더불어 나누고자하는 소통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세종은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리더이기도 했다. 스스로 엄청난 분량의 공부를 하고, 축적된 지식을 경연이라는 공동학습프로그램과 정례회의를 통해 확장시켜나갔다. 재위 32년간 경연 횟수만 1800회가 넘는다. 관료 및 학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다보니 전체 관료들의 지식수준은 저절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경연을 통한 국정운영은 신하들에게 있어 일종의 참여적 리더십으로 발휘됐다. 세종은 신하들과 상의해 의사결정을 했고, 이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신하들의 노력과 만족도를 높이는 동시, 성과를 향상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세종은 대다수와 의견을 달리하는 이의 말도 동등하게 수용하며 '집단적 사고'라는 오류가 발생하지 않게끔 했다. 경연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그 절차와 방법을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지원했다. 구성원들이 늘 평등한 분위기에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은 세종이 관계지향적 리더십을 통해 조직원들의 성과를 최대한 끌어내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끔 한다. 세종은 충분한 토론을 통해 얻은 결론은 전적으로 일임했다. 책임과 권한을 확실히 부여했고, 성공한 이에게는 보상을 함으로써 다른 신하들에게까지 경쟁동기를 부여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진족 토벌에서 성공한 최윤덕에게 우의정 자리를 제시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특히 세종은 정보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던 인물이었다. 토벌과정에서 무력보다 정보의 우월성을 깨달은 그는 기만술과 정보통제를 적극 활용했다. 의도적으로 여진족에게 온천행차 정보를 흘린 후, 적이 방심한 사이 적은 군력으로 상대를 토벌하는 결과를 얻었다. 세종은 당시 명나라의 정보에 밝았던 조선 출신 환관들을 귀하게 대하며 명나라의 방대한 소식을 발 빠르게 접했다.(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조슬기나 기자 seul@<ⓒ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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