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비-⑤희빈 장씨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희빈 장씨는 과연 희대의 악녀인가? 수많은 역사서와 드라마, 영화에서는 장희빈을 악녀로 인현왕후 민씨를 현숙한 여인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오히려 희빈 장씨는 중인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 적극적인 여성으로 풀이된다. 또 격변의 시대 속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 정쟁의 희생양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백성도 유생도 모두 무시했던 그녀미천한 신분 굴하지 않고 운명 개척여성으로서 정치권 장악 정국 주도숙종은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후 후궁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정했다. 그만큼 희빈 장씨는 당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숙종 대에는 그 이전 시대보다 신분제 사회의 균열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중인 출신이자 어머지나 천인인 그녀가 명문가 출신인 인현왕후 민씨를 제치고 왕비가 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이 받침이 됐기에 가능했다. 장씨의 왕비 책봉은 조선의 신분제를 뒤흔들었다. 조선시대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신분은 대부분 사대부였다. 종실이나 대신들의 자제는 음서로도 진출했으나 대부분은 과거를 통해 선발됐다. 과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양반과 양인이었다. 천인과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있는 신분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장씨 집안은 어머니가 천인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장씨의 외삼촌, 오라버니는 벼슬에 제수됐다. 중인 출신의 아버지를 옥산부원군으로 봉하게 하고 오라버니 장희재를 훈련대장으로 삼았다. 신하들은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며 거세게 반대했지만 장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폐비가 된 민씨는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선 집 밖의 왕래를 금하고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친척과 이웃에서도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양식과 땔감 마저 떨어져 살림살이도 궁색해졌다. 근신하며 지내는 민씨에 대한 소문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항간에서는 민씨와 장씨를 빗대어 노랫가락 '미나리요'를 만들어 불렀다. '미나리요'는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라는 가사로 시작되며 여기서 미나리는 민씨, 장다리는 장씨를 가리킨다. 백성들은 장씨의 권세가 한철용, 즉 얼마 못갈 것이라며 민씨를 국모로 생각했다. 결국 장씨는 빈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장씨는 민씨를 국모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든 자신이 민씨를 제거하고 왕비로 복귀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씨의 적은 신분제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백성들도, 유생들도 모두 그녀를 무시했다. 천인 신분으로서 어떻게 국모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씨는 이러한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은 장씨의 죽음을 통해 많은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 했다. 하지만 결국 역사의 새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숙종 대 신분제의 불합리함을 느낀 사람들은 비밀 결사 단체를 만들어 체제에 항거했다. 신분 제도의 불합리성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한 사람들에게 장씨의 삶은 희망을 줬다.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도 사대부들을 조종하는 왕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씨는 자신의 삶을 찾아 모든 사람들이 신봉하는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을 찾은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6년이었다. 장씨는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은 남편 숙종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남성 국왕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으로 정국을 주도했고 여성으로서 정치권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려운 환경과 배경을 이겨내고 자식을 왕으로 만든 그의 삶을 통해 상황을 탓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개척해내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또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 두 여성은 단순히 숙종을 둘러싼 왕의 여인이 아니라 남인과 서인 각파가 벌이는 권력쟁탈의 상징이기도 했다. 민씨가 여흥 민씨 가문을 배경으로 한 서인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면 역관 가문 출신인 장씨는 남인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었다. 실제 권력과 함께 그들의 인생은 부침을 겪었다. 민씨는 서인의 집권과 함께 왕비가 됐다가 서인의 몰락과 함께 폐비가 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복위가 됐다. 반면 장씨는 서인이 실권을 할 무렵 희빈으로 서열이 올랐다가 남인이 정권을 잡은 후 왕비에 책봉됐다. 하지만 역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며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사약을 받게 된다. 현대경제연구원 공동기획 도움말: 역사학자 윤정란 조슬기나 기자 seul@<ⓒ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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