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칼 말론 등 NBA 스타들을 불러모아 '드림팀'을 구축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육상 10종경기에 출전한 선수 출신으로 1952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돼 20년 동안 장기 집권한 에이버리 브런디지(미국)는 아마추어리즘의 수호자였다. 브런디지의 재임 시절 프로 선수들은 올림픽에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무렵까지만 해도 "올림픽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다"는 올림픽 강령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상업주의에 물들고 정치에 오염됐으며 나라의 힘을 뽐내는 무대로 바뀐 지 오래다. 고집불통 브런디지 위원장이 지하에서 땅을 칠 노릇이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테니스가 프로에 문을 연 이후 종목별로 프로 선수들이 올림픽 무대를 밟고 있다. 서울 올림픽 테니스 여자부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의 프로 선수 슈테피 그라프가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를 2-0으로 완파하고 프로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는 전원 프로 선수로 이뤄진 한국이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남자 축구는 1996년 애틀랜타 대회부터 23살 이하(3명의 24살 이상 와일드카드 별도)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이 이뤄지고 있다.
프로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슈테피 그라프(슈테피 그라프 홈페이지)
올림픽이 프로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가장 큰 화제거리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농구에 출전한 미국 대표팀, 이른바 '드림팀'이었다. '드림팀'의 인상이 워낙 강해 이후 여러 분야에서 이 말을 끌어다 썼다. 20여 년 전의 '드림팀'에 대해 잠시 살펴본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는 선수들을 모아 놓은 NBA를 운영하는 나라이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남자 농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열린 17차례 올림픽에서 13번이나 우승한 나라이며, 프로 스포츠가 성행하면서도 해마다 3월이면 아마추어인 남자 대학 농구로 한바탕 몸살을 앓는 나라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소련에 50-51로 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이어온 연속 우승 행진을 7에서 멈췄지만 그때 결승전에서 있었던 심판진의 불공정한 판정을 이유로 시상식을 거부하는 등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출전하지 않았기에 '농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달랐다. 미국은 준결승에서 아비다스 사보니스(220cm)가 이끄는 소련에 변명의 여지없이 76-82로 지며 동메달에 머물렀다. 소련의 연방공화국이었던 리투아니아의 전설적인 농구 스타 사보니스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어느 신문사 기자가 장신 선수 일색인 소련 선수단에서 그를 찾아 인터뷰하기 위해 무작정 키 큰 선수들을 붙잡고 "유, 사보니스(You, Sabonis)?"를 연발한 얘기는 아직도 서울 올림픽과 관련한 우스갯소리로 기자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아비다스 사보니스(리투아니아, 오른쪽)는 소련 소속으로 출전한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농구 준결승에서 미국에 뼈아픈 패배를 안긴 주인공이다. 당시 활약은 훗날 미국이 '드림팀'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1940년대 중반 이후 이미 프로 농구를 시작한 미국은 1980년대까지 지켜진 IOC의 아마추어리즘과 세계 농구 수준을 깔본 자세가 맞물리며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 프로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미국의 아마추어 농구 수준은 1960~70년대 주한 미 8군 팀이 한국대표팀과 평가전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서울 올림픽에서 충격을 받은 미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이른바 '드림팀Ⅰ'을 내보냈다.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 등 흑인 스타플레이어는 물론 신구(新舊) 백인 가드인 존 스탁턴과 래리 버드까지 포함돼 있는, NBA가 꾸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팀이었다. 이들은 앙골라와 치른 A조 1차전(116-48)부터 크로아티아와 가진 결승전(117-85)까지 8경기에서 모두 100점 이상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117.3 득점, 73.5 실점의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다. 선수촌 입촌을 거부하고 초호화 호텔에 묵는 등 눈 꼴 사나운 행동을 노출했지만 워낙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기에 각국 기자들의 펜 끝은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마이클 조던(가운데)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구겨졌던 미국 농구의 자존심을 일으켜세웠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이제 올림픽에서 마지막까지 아마추어로 남아 있는 복싱도 프로 선수들이 출전할 모양이다.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지난달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독일 dpa통신과 인터뷰에서 "국제복싱연맹(AIBA)이 IOC에 프로 복싱 선수들의 2016년 올림픽 출전을 허용해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고 말했다. 로게 위원장은 "IOC는 이 문제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토라는 말은 긍정적이라고 풀이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출전 선수 나이 제한과 헤드기어 착용 문제 등 AIBA와 IOC의 주장을 조율하는 과정이 마지막 걸림돌일 것이다. 야구가 2008년 베이징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에서 퇴출된 까닭 가운데 하나는 "올림픽 무대에서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원하는 IOC와 리그 운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메이저리거들을 내보낼 수 없다는 미국의 주장이 맞섰기 때문이다. 물론 금지 약물 범위에 대한 이견도 있다. 아무튼 브런디지 이후 반세기 만에 올림픽 정신은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아시아경제 & 재밌는 뉴스, 즐거운 하루 "스포츠투데이(stoo.com)">이종길 기자 leemean@<ⓒ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newsva.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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