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 칼럼]달리면 달릴수록 달라진다

양재찬 논설실장

어릴 적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운동회는 지역축제였다. 며칠 전부터 잠을 설쳤고 제발 비가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백군ㆍ청군으로 나뉘어 시합을 벌였고 총출동한 가족의 응원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달리기였다. 호루라기 신호와 함께 젖 먹던 힘까지 내 달렸다. 3등 안에 결승선을 통과해 받는 공책과 연필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다.  언제부턴가 운동회를 하지 않는 초등학교가 많아졌다. 아이들도 뜀박질을 잊고 산다. 마음 놓고 뛰어놀 시간이 없고 달릴 공간마저 줄었다. 학교 운동장은 자꾸 들어서는 건물과 시설로 옹색하고, 아파트단지 놀이터는 주차장으로 변한다.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학원으로 달려가고, 학원에 다녀와선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지낸다. 이렇게 그전보다 덜 움직이면서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키가 크고 영양상태도 좋은데 체력은 약해졌다. 소아비만이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지금 달구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하이라이트는 100m 남자 달리기다. 세계 기록은 이번 대회 결승에서 부정 출발로 실격당한 우사인 볼트가 2009년 대회에서 세운 9초58, 한국 기록은 자격예선에서 실격당한 김국영 선수가 지난해 31년 만에 갱신한 10초23이다. 우리나라 보통사람의 달리기 기록은 국민체력실태조사에 나와 있는데 100m는 없고 50m만 있다. 볼트와 비슷한 나이대인 25~29세 남성의 50m 평균기록은 2004년 7.7초, 2009년 8.5초다. 5년 새 0.8초 늦어졌으니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의 젊은이 체력이 떨어졌다는 방증이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생활의 연륜은 불어나는 '배둘레햄(배둘레 살)'과 비례한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잦은 회식과 음주흡연으로 몸무게가 불어나고 그만큼 성인병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살이 찌면 남성은 허리가 굵어지고 여성은 엉덩이가 커진다고 해 일컫는 '배둘레햄남(男)'과 '엉뚱녀(女)'가 중년층의 대명사로 통한다. 당뇨ㆍ고혈압ㆍ위장병ㆍ뇌졸중ㆍ암 등 성인병이 잘못된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고 해 '생활습관병'으로 부르듯 생활습관을 바꾸면 상당수 성인병을 예방하고 고칠 수 있다. 굳이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땀 흘리며 달리면 달릴수록 몸이 달라지고 정신도 맑아진다. 포기하지 않고 골인지점까지 뛰는 인내와 불굴의 '달리기 정신'은 삶의 자세를 바꾼다.  '경영도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철학인 민계식 현대중공업 회장은 백발의 마라토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풀코스 완주만 200회가 넘는다. 중학생이던 1950년대 초부터 달리기를 시작한 그에게 마라톤은 삶의 원동력이다. 2001년 퇴행성관절염을 치료하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은 완주 때마다 기부를 받아 17억5000만원을 모금해 불우이웃을 돕는 데 썼다.  필자도 나이 마흔 되던 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달리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날 때도 가방 안에 운동화를 챙겼다. 처음에는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찼다. 꾸준히 달리자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고 거리도 늘어났다. 마흔에 달리기 시작한 '사십이주(四十而走)', 효과가 있었다. 얇아지는 배둘레햄에 맞춰 허리띠를 가위로 잘라낼 때의 통쾌함이란.  5㎞ 달리기 대회에 몇 차례 참여한 뒤 10㎞로 늘렸다. 여세를 몰아 하프 마라톤도 해냈다. 올 가을이나 내년 봄 풀 코스 도전을 목표로 연습하다 그만 발목이 삐끗하며 인대를 다쳤다. 욕심이 과했나 보다. 절룩거리며 대구 육상선수권대회 중계를 보니 마음은 더욱 달리고 싶다. 마침 한반도가 이제야 우기(雨期)를 벗어난 듯 날씨가 쾌청하고 하늘도 푸르다. 양재찬 논설실장 jayang@<ⓒ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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