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미기자
무용가인 최승희(1911~1969)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그의 모교인 서울 숙명여자중고교 등에서 다양하게 열린다. 사진은 1938년 최승희의 무녀춤 모습. [[최승희기념사업회 제공]]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에서 그에게 직접 사사받은 김영순(75)씨가 기억하는 최승희는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김씨에게 '춤의 모든 것'을 가르친 이는 지금부터 100년 전 이 땅에 태어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1911~1969)다. 최승희는 '예술에서 수평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예술이란 직선으로 뻗어가듯 단조로우면 안 된다는 뜻이다. 천만가지가 넘는 사람들의 표정만큼 다채로운 인간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예술에도 강약과 굴곡, 그리고 매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승희의 대표적인 춤인 <장구춤>에도 '매듭의 미학'이 숨어 있다. 장구를 메고 치면서 그 장단에 맞추어 여러 가지 기교와 가락을 펼치는 <장구춤>은 1930년대 최승희에 의해 무대예술로 정착되기 시작해 현재 완전한 독립무로 발전했다. 최승희는 "관객이 기억해야 할 것은 장구 소리가 아니라 뇌리에 박힌 장면"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용가라면 소리가 아니라 육체로 말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순간의 보이지 않는 매듭이 있어야 매력이 있다"며 "관객들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 동작을 매듭지으면서 관객의 뇌리 속에 장면을 새겨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의 공연을 본 관객들이 숨 막힌다는 찬사를 쏟아낸 것은 그녀가 매듭이 가지는 매력을 온전히 무대에서 발산했기 때문이다.보살춤을 추는 최승희<br />
평탄하면 지루해지고 마는 예술처럼 그의 인생도 수많은 굴곡을 넘나들었다. 최승희는 나라를 잃고 암흑과도 같았던 시대에 태어나 미치지(狂)않으면 미칠(及)수 없다며 불꽃같은 생을 살다 갔다. 15살에 처음 접한 '이시이 바쿠'의 무대를 보고 무용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은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세계적인 무용가였던 스승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3년 간 밥도 잠도 연습실에서 해결하며 춤을 배웠다. 1929년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연구소를 세우고, 서양의 무용형식에 한국적 이미지와 동양적 정서를 접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보살춤, 선녀춤, 초립동, 부채춤 등은 최승희가 한국의 전통무용을 현대화해 자신만의 독특한 춤 세계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그가 춤가락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해 현대인들의 감성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면서 무용을 천시하던 풍토도 바뀌기 시작했다.1938년 모교인 숙명여고를 방문한 최승희<br />
숙명여고(교장 이돈희)는 이날 최승희에게 모교의 명예를 빛낸 동문에게 수여하는 '대숙명인상'을 수여했다.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백봉(90)씨가 대신 상을 받았다. (사)무용가최승희기념사업회는 최승희 탄생 100주년 기념하여 오는 8월 8일 최승희 추모제가 개최되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서 전시회와 함께 미공개 영상 및 미공개 자료를 공개하는 행사를 연다. 또 탄생일인 11월 24일을 전후해서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영상물과 자서전,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 등 무용체계를 정립한 저서 원본 등을 공개하며 테마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상미 기자 ysm1250@<ⓒ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