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나의 캐디편지] 내겐 너무 소심한 고객님

내겐 너무 소심한 고객님이 있습니다.5개 홀이 지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클럽을 바꿀 때도 제가 어림잡아 가져간 몇 개의 클럽 중에 하나를 고르셔서 치고 볼을 칠 때도 언제 쳤는지 모르게 샷을 끝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린으로 걸어가십니다. 자꾸 타이밍이 안 맞아 볼을 못 봐드리는 게 죄송스럽기도 하고 말씀이 워낙 없으셔서 첫 홀부터 저한테 삐치신 게 있나 생각하면서 한 홀 한 홀 지나가던 도중 참다못해 제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고객님,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왜 말을 안하세요?" 그러자 고객님 얼굴이 빨개지십니다. 역시 말이 없으시더군요. 또 몇 개 홀이 지나가고 파4홀 세컨드 샷 지점 페어웨이 왼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몰래 치신 볼이 뒤땅을 맞아 '또르르르' 구르면서 겨우 30m 앞에 서 버렸죠. 제가 안봤을 거라고 생각하셨겠지만 다른 클럽을 챙겨 얼른 고객님께 뛰어갔습니다. "고객님, 클럽 바꿔서 치세요." 고객님께서 다시 친 공이 야속하게도 또 30m만 굴러갔습니다. 클럽을 여러 개 가지고 다니게 하는 고객님이 밉기는 했지만 하도 말씀이 없으셔서 직업정신을 발휘해 간단한 레슨을 해드리고 다시 쳐 보라고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성의를 아셨는지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저기 미안한데 나 칠 때는 쳐다 보지마세요." 알고 보니 "언니~"라고 캐디를 부르는 말도 그리고 공을 칠 때 누가 쳐다보는 것도 부끄러워하시는 '왕소심… 고객님이었습니다. 아까 따져 물은 게 죄송해서 "고객님 목소리가 아주 멋지신데 목소리 좀 자주 들려 주세요"라며 말씀드렸지만 눈치 없는 제가 고객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아 라운드 내내 속이 상했죠. 하지만 라운드가 끝나고 클럽하우스로 올라가시면서 기분 좋은 한마디를 남겨 주십니다. "언니, 그래도 나 오늘 말 많이 한 거에요."스카이72 캐디 goldhanna@hanmail.net<ⓒ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골프팀 김현준 골프전문기자 golfkim@ⓒ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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