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석기자
동부그룹 로고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동부그룹은 다른 여타 기업들에 비해 늦은 지난 1969년 설립돼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국내 대다수 기업의 창업주들이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 또는 6.25 전쟁과 같은 일대 격동기에 집안의 생계를 위해 상업의 형태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것과 달리, 김준기 회장은 해방 전후 세대로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60년대 말 처음부터 “기업다운 기업을 만들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창업을 했다.유명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으며 자란 덕에 김 회장은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이 시대의 젊은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하고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자연스럽게 키워나갔다.대학 재학중이던 1968년 전자업계의 미국 우수인재 유치단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김 회장은 초강대국 미국을 이끄는 힘은 경제력이며, 이 경제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기업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국가 근대화 기여 위해 창업= 산업보국(産業報國)의 신념을 굳힌 그는 귀국하자마자 창업 준비작업에 착수한 그는 마침내 1969년 동부건설의 전신인 미륭건설을 창업했다. ‘미륭(美隆)’은 ‘아름답게 솟아오른다’는 뜻으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좋은 기업’을 만들어 보겠다는 창업주의 포부를 담고 있다.창업 초기인 1973년, 오일쇼크 여파와 극심한 불황으로 ‘국가 부도’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김 회장은 당시 중동 지역에 불고 있던 건설 붐에 주목했다. 외화 획득을 통해 어려운 나라 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 해 말 사우디에 지사를 설치, 현대건설 등 다른 국내 업체들에 비해 3년 가량 빨리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했다.이듬해 미육군공병단이 발주한 주베일 해군기지공사를 당시 국내 업체의 해외수주 역사상 최대 금액인 4800만달러에 수주하고, 이후 1980년 중동 지역에서 사실상 철수하기까지 약 5년간 20억 달러에 달하는 공사를 수행하며 외형과 손익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설업체로 부상했다. 1970년대 중동 건설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밑거름으로 동부는 1980년대 들어 여러 업종의 회사들을 설립하거나, 인수하는 방식을 통해 금속, 화학, 건설·물류, 금융 등 국가 기간산업 중심의 복합화 전략을 추진하며 오늘날의 동부그룹을 만들었다. 김 회장은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사업을 하겠다”는 신념과 기업가정신으로 부동산이나 소비재산업이 아닌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투자에 전념했다. ◆기간산업만 투자= 1983년 미국 몬산토와 국내 최초로 반도체용 실리콘웨이퍼 제조회사인 실트론을 합작 설립했다. 때마침 정부가 30년 동안 문을 걸어 놓았던 금융시장을 개방하자 신규 허가를 받아 동부투자금융(현 동부증권)을 세우고 손해보험업(동부화재)에 진출했으며, 미국 보험사 애트나와 합작으로 동부생명을 설립했다. 또 여객운송업만을 하던 동부고속에 물류, 하역, 창고업종 회사들을 합병시켜 육상운송전문 종합운송회사인 동부익스프레스로 키웠다. 이어 합금철·선재사업의 동부메탈, 냉연강판의 동부제강(현 동부제철), 비료·농약의 동부한농(현 동부하이텍 농업부문) 등 중화학공업에 투자를 집중했다.성공적인 사업복합화 과정을 통해 그룹 체제로 발전하면서, 김 회장은 대외적으로 각 계열회사들에 대한 대표성을 확보하고, 내부적으로는 임직원들의 소속감과 일체감을 고취할 필요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동부는 그룹기업으로서의 일체화 작업을 추진해, 1984년 1월 1일부로 동부그룹의 상징인 ‘태양’ 심볼을 전 계열사에서 사용토록 하고, 동부그룹이라는 명칭도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태양 심볼은 동부고속의 고속버스 운행이 시작된 1972년부터 사용된 것으로, 희망과 무한한 가능성, 세상을 향해 모든 것을 주고도 남음이 있는 넘치는 힘을 상징하는 ‘아침 해’를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1985년 5월 1일부로 그룹의 사기(社旗) 역시 이 태양 심볼을 사용한 것으로 바꾸고 그룹 CI를 통일하는 작업도 병행해 1988년에는 이에 따른 C.I.매뉴얼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