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희장자는 얼마나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은 인민군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여단 등 총 10만명의 병력을 동두천, 춘천, 강릉 등 11개 지역에 동시 남침한다. 대한민국은 국내외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준비되지 않은 전투를 맞이하게 되고 계속적인 후퇴를 하고 만다. 다음날 의정부가 점령당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결의안을 가결하고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파병을 결의한다. 3년1개월 2일 동안의 전투는 이렇게 계속되고 결국 1953년 7월27일 밀고 당기던 전쟁에 휴전선을 긋는다. 6ㆍ25전쟁으로 인해 약 600만명의 인명피해와 전 국토의 70%가 초토화되는 등 상처를 입었으며 당시 전사했으나 찾지 못한 13만여명의 호국용사 유해는 아직도 한반도의 땅속에서 빛을 보지 못한 채 잠들고 있다. 특히 전사자는 개전 초기에 많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해 인근에서 발견된 만년필
북한이 38선 전선으로 기습납침하면서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춘천과 강릉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전 전선이 붕괴돼 한강, 차령산맥과 금강, 소백산맥을 거쳐 지연전 형태로 낙동강까지 밀려난다. 전문가들은 전쟁관련 사료를 토대로 따져볼때 이 기간 중 전사자가 2만여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공군의 개입에 따른 전사자도 1만여명을 넘는 것으로 분석된다. 중공군 13병단, 9병단으로 구성된 30개 사단 30만명이 6ㆍ25전쟁에 투입돼 유엔군의 국경선 진출을 저지하고 38선까지 진출,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운산.개천.희천 일대에서의 전투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고 육상과 해상을 통해 38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는 과정에서 1만6000여명 이상의 국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희생이 1.4후퇴 이후 그해 7월초까지 이어진다.
유해 인근에서 발견된 아군용 전투화
유엔군은 중공군이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된다. 곧이어 국군은 반격작전을 펼쳐 1951년 3월18일에 서울을 되찾는다. 이 상황에서 국군은 홍천, 횡성, 현리 일대에서 심대한 손실을 입게 되고 이기간중 2만60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르면서 국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땅속에 60여년간 묻혀있었던 소총과 수통들.
1951년 후반부터 정전회담과 연계해 설정된 군사분계선확보를 위한 고지 쟁탈전과 국지전, 장기 교착전 양상을 보임에 따라 피해가 더 늘어나 지금의 155마일 전선일대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5만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이 중 20% 이상은 현재의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1만5000여명의 전사자가,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에서 6000여명, 38선 돌파와 북진과정에서 1만40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6ㆍ25전사자 유해소재 관련 자료집에서 집계하고 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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