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셋, 애들 다섯. 그냥 '애들'이 아니다. 어른 밥을 게 눈 감추 듯 해치우는 악동들이다. 밥 먹고 돌아서면 간식을 찾는 천방지축 '초딩'들이다. 한창 먹을 나이다. 그러니 그냥 사람 여덟으로 치자. 세 가족, 여덟 명이 작정하고 외식을 했다. 가계 출혈은 피할 수 없는 일. 운이 좋았다. 동네에서 우연히 '반값데이' 식당을 찾았다. 부대찌개집이었다. 사리와 밥과 반찬은 무한리필, 가격은 평소의 2분의 1. 세상에! 대박이다, 어른들은 합창했다. 엄마! 다음에 또 와요, 애들은 환호했다.
마눌님이 '로또 맞았다'며 들려준 엊그제 일이다. 계산서에 찍힌 금액은 2만9000원. 사람 여덟 명이 포식한 대가치고는 지극히 착한 가격이다.
원래 그 식당은 파리만 날렸다. 목도 별로였고 음식 맛도 맹맹했다. 그런데 매달 15일을 반값데이로 정하면서 기적이 일어났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긴 줄이 장사진을 이룬다. 30분 이상 기다리는 것은 예사다. 포장 주문도 빗발친다. 반값이면 손해가 아니냐고?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말을 어찌 믿나. 덕분에 평일 손님도 늘지 않았나. 동네 명물이 되지 않았나. 하기야, 장사만 잘 된다면 '반값데이'가 대순가. '반의반값데이'라도 못하겠나.
반값데이는 대한민국 '데이시리즈'의 한 조각이다. 연인끼리 초콜릿, 사탕을 주고받는 발렌타인데이(2월14일)와 화이트데이(3월14일)를 필두로 삼겹살데이(3월3일), 자장면데이(4월14일), 오리데이ㆍ오이데이(5월2일), 라면데이(8월8일), 치킨데이(9월9일), 와인데이(10월14일), 빼빼로데이ㆍ가래떡데이(11월11일)가 달력을 빼곡히 채운다. 하나같이 상술의 피조물이다. 빼빼로데이가 포함된 9~11월 빼빼로 매출은 한해 매출의 절반에 이른다. 자장면데이에는 자장면집 전화통에 불이 나고, 치킨데이에는 온 동네 닭집 튀김솥이 가열차게 김을 뿜어댄다.
혹자는 경박한 소비라고 핀잔하지만 '○○데이'는 이미 우리 삶에 밀착해 앉았다. 노곤한 일상에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은 이벤트인 것이다. 찌들고 지친 삶은 그 소박한 소비에 잠시나마 몸을 의탁한다. 결핍과 궁핍으로부터 잠깐이나마 영혼을 구원받는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는 나를 위한 나만의 '○○데이'를 나에게 제언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침묵데이'다. 싸구려 말들이 넘치고 범람하는 혼탁한 시대에는 마땅히 말을 줄여야 한다. 또한 한 주에 하루는 '가족데이'다. 그 무엇(사람이든 안주든)이 유혹하더라도 퇴근하면 집으로 '직진'이다. 저 부대찌개집처럼, 그렇게라도 내 인생의 작은 기적을 소망하는 바이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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