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원숭이 기병에 코끼리, 흑인용병까지 참전한 국제전, '임진왜란'
기사입력 2018.09.11 14:30최종수정 2018.09.12 15:20 디지털뉴스부 이현우 기자
(사진=영화 혹성탈출2 장면 캡쳐)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임진왜란 당시 소사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알려지면서 역사상 최초로 대륙별 용병들이 모두 활약했던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간 한·중·일 동북아시아 3국간의 전쟁으로만 부각됐던 이 대전이 실제로는 동북아를 넘어 아시아 각지는 물론 포르투칼 용병들까지 참전한 국제 용병들의 첫 집결지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 유명한 것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그림이다. 여기에 등장한 흑인용병인 '해귀(海鬼)'와 원숭이 기병대로 알려진 '원병삼백(猿兵三百)'은 당시 명나라가 조선의 원군으로 데려온 여러 부대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이 그림은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지는 세전서화첩 중 임진왜란에 파병됐던 명군 14만명이 귀환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원숭이 기병대는 충남 천안 일대 소사(素沙) 지역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던 소사대첩에서 맹활약한 부대로 알려져있다. 이 병사들은 중국 남부에서 온 원숭이 부대라 하여 '초원(楚猿)'이라 흔히 불렸으며, 말을 다루는 솜씨가 사람 못지 않았으며 능히 적진에 돌진해 놀란 왜군을 물리쳤다고 나와있다.

임진왜란 당시 원숭이 기병대의 모습이 나와있는 것으로 알려진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그림 모습.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 쓰인 깃발 아래 털복숭이 원숭이처럼 보이는 병사들이 그려져있다.(사진=한국국학진흥원)

이 부대가 어디서 왔는지는 사실 명확치 않다.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명의 장수 양호(揚鎬)의 휘하에 잇었다고 하지만 실제 명나라에서 양성한 병력인지, 용병으로 온 다른나라 군대인지는 자세히 알려져있지 않다. 원숭이를 훈련시켜 열매를 따오게 하는 것은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 일대 국가들에 남아있던 풍속이기 때문에 원숭이 기병대가 실제 존재했다면 이러한 동남아 지역에서 훈련받아 온 용병으로 추측된다. 일각에서는 동남아 일대에서 활약하던 종족 중 하나가 원숭이 모양의 옷을 뒤집어쓰고 용병으로 참전했을 것이란 설도 있다.

용병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는 실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여러나라의 용병을 썼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 만력제(萬曆帝)의 사치와 태업 속에 각종 전쟁으로 재정악화에 시달리고 있던 명나라는 전비를 줄이기 위해 가급적 명나라 본군을 원군으로 보내는 것을 꺼리고 주변 국가 용병들에게 일종의 하청을 주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명나라 주변의 수많은 나라에서 힘깨나 쓴다는 용병들이 조선으로 갈 원군으로 고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재정상황을 고려치 않고 조선에 대규모 원군을 파병해 망국의 주범으로 불리게 된 만력제의 모습. 재정악화가 심해진 명나라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주변국 용병들을 싼값으로 고용했다.(사진=위키피디아)

선조실록에도 이런 다국적군이던 명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선조26년 4월 기사 중에 당시 병조판소 이항복이 의주 부근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의 부대를 방문했는데, 이때 유정이 각 용병들의 무술을 소개한다. 이때 소개된 병사들은 태국, 인도, 티벳, 미얀마, 몽골 등등 아시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의 무기 또한 소개된다. 원숭이 기병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전투코끼리부대, 몽골 타타르의 거인 용사들, 흑인용병 등 각종 세계 용병들의 전시장이었던 셈이다.

이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선조 31년 5월 기사 중에는 선조가 명나라 장수 팽신고(彭信古)와 만났는데, 이때 팽신고가 선조에게 파랑국의 해귀를 보여준다며 그들을 불러 검법을 시험케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파랑국은 포르투칼을 뜻하며, 해귀는 당시 포르투칼령 마카오에 거주하던 포르투칼 흑인용병대로 명나라가 마카오 총독부에 의뢰해 고용한 용병대였다.

이러한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은 전후 임진왜란을 다룬 각종 문학작품에서 일종의 판타지처럼 남게됐다. 안타까운 점은 이때 잠시나마 국제 인종전시장이 됐던 조선은 전후 다시 폐쇄적인 국가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조선의 굳게 걸린 빗장이 열리고 국제사회에 문호가 완전히 개방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300년 가까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