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A씨는 2000년 중견기업에 입사해 사반세기를 한 회사에 몸담았다. 대학생과 고교생 자녀를 둔 외벌이다. 월급과 4대 보험, 학자금 등을 생각하면 정년까지 회사에서 버티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2년 전부터 음식점 창업을 준비하며 잘된다는 음식점에서 무보수로 일하고 주요 프랜차이즈 본사를 다니며 상담을 받았다. 고심끝에 내년 직장인이 많은 수도권에서 음식점 창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만난 A씨는 12·3 계엄으로 창업을 미루고 지인의 회사에서 알바하며 창업, 재취업 등 다양한 가능성을 따져보겠다고 했다. A씨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니 음식점을 하고 있는 지인들마저 ‘지금은 아니다. 나도 죽을 맛이다’라면서 만류하더라"고 했다.
비상계엄 때문에 인생 캘린더가 어그러진 것은 A씨뿐만 아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10∼12일 소상공인·자영업자 505명)를 보면 응답자의 절반(46.9%)은 계엄·탄핵 사태 등의 영향으로 12월 들어 직·간접적인 피해를 봤다. 피해가 없다는 응답자 절반(46.6%)은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10명 중 4명은 국내 경제의 불확실성이 1∼2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내다봤다.
비상 경영에 들어간 기업들은 내수 부진과 도널드 트럼프 시즌2 대비도 어려운 마당에 초대형 폭탄을 맞았다. 식음료, 유통 등에서는 이미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고 계엄과 탄핵 이슈로 반도체, 석유화학, 건설, 원전 등의 산업은 불확실성이 커졌다. 원·달러 환율 급등도 원재료 수입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에 부담이다. 면세점과 여행업계도 해외 단체관광객이 줄어들까 걱정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에 맞춰 정부와 기업, 국회가 원팀처럼 대응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재계가 반대한 국회 증언법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재의요구권을 발동해 한시름 놨다. 하지만 이 법이 국회서 다시 처리되거나 재계가 우려하는 상법개정안 등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말 그대로 내우외환이다. 기업들이 채용계획을 수정하면서 취업준비생들의 취업 문은 좁아졌다.
관가의 시계도 멈췄다. 조만간 내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는데 이 시국에 장밋빛 청사진을 내걸고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해봐야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죄인 아닌 죄인이 된 공무원들은 몸 사리기에 급급하다. 월급은 매년 제자리이고 그나마 기댈 것은 승진 등 인사였는데 사실상 올스톱됐다. 윗선부터 정리가 돼야 하는데 누구도 과거처럼 인사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이기 때문이다. 조기 대선으로 정권이 바뀌면 또 인사 태풍이 불고 희비가 갈린다.
비상계엄의 충격은 지금도, 당분간 계속되고 향배를 알 수 없다. 정신과 전문의 510명이 낸 성명서처럼 군부독재와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는 많은 국민은 그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며 심각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발동한 이유를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더불어 경제주체들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겨주며 서민경제와 기업경제 전반에 힘들게 만들어놓은 계획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놨다. 정치가 국민의 삶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토록 무참히 망가뜨릴지는 몰랐다.
이경호 이슈&트렌드팀장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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