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27일(현지시간) 1달러당 120루블을 넘어서며 32개월 만에 최저치로 폭락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수준이다. 조기종전을 공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최근 조 바이든 행정부와 서방 주요국들이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데 따른 여파로 분석된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은 장중 한때 달러당 120루블을 기록했다. 120루블을 넘어선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인 2022년 3월22일 이후 처음이다. 이는 그만큼 달러화 대비 루블화 가치가 떨어졌음을 뜻한다. 침공 전까지만 해도 달러당 75~80루블 수준이었던 환율은 2022년 2월 침공 직후 150루블까지 치솟았다가 이후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안정세를 되찾은 바 있다.
특히 최근 루블화 약세는 지난 21일 미국이 러시아 3위 규모 은행인 가스프롬은행을 제재 명단에 포함한 이후 두드러지고 있다. 가스프롬은행은 러시아와 유럽국가 간 천연가스 거래 결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온 은행이다. 여기에 최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를 미국, 영국의 장거리 미사일로 타격하고, 러시아 역시 신형 중거리 미사일로 맞대응하면서 전황도 격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년 1월 트럼프 당선인으로의 미 정권 교체를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 서방 주요국이 한층 제재를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여파를 미쳤다.
이와 함께 폴리티코는 원유 가격 하락, 전쟁 수행을 위한 러시아 지출 급증 등도 러시아 경제에 부담을 안기면서 루블화 약세의 원인이 됐다고 짚었다.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가격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간 휴전 합의로 이번주에만 4%가량 하락했다.
루블화 약세는 러시아 수출엔 긍정적이지만 이미 높은 인플레이션을 한층 부추길 것으로 우려된다. 현재 공식 지표상 러시아의 물가상승률은 8.5%지만, 실제는 이보다 더 높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대응해 러시아 중앙은행(CBR)은 이미 기준금리를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인 21%까지 올린 상태다. 12월에도 추가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통상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은 통화가치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꼽히지만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는 시기나 외환시장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땐 한계가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저성장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결합한 침체 조짐을 보인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폴리티코는 "올해 들어 러시아 중앙은행이 금리를 급격히 끌어 올렸음에도 루블화 가치가 달러 대비 4분의 1가량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전했다.
다만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부 장관은 이러한 루블화 약세가 러시아의 수출에는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날 모스크바에서 열린 금융 콘퍼런스에 참가해 "오늘 환율은 수출업체에 매우, 매우 유리하다"고 말했다. 일간 가디언은 공식 석상에서 재무부 장관의 환율 관련 발언은 드물다면서 러시아가 루블화 가치 하락을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주목했다. 또한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올해 러시아의 예산 중 약 3분의 1은 군사비에 배정됐다.
조슬기나 기자 seul@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