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한국은 공공재정에서 더 이상 신용등급 강자가 아니다"며 "부채 억제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과거 한국 경제의 여러 강점 가운데 하나가 재정건전성이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0%에도 미치지 않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신인도를 유지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는 건전한 재정 상황이 빠른 경제 회복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1948년 정부가 출범한 이래 2017년까지 누적 국가채무가 660조원이었지만 문재인 정부 5년을 거치면서 1076조원으로 불어났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400조원이 넘는 국가채무가 늘어난 것은 방만한 재정 운용 때문이라는 비판이 많다.
정부가 지난달 27일 677조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했다. 올해 본예산보다 3.2% 늘어난 금액으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정 준칙 범위 내로 편성했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48.3%로 올해와 비교해 0.8%포인트 높아지는 수준으로 억제했다. 한마디로 ‘고강도 긴축’이다.
가장 의미를 둘 만한 대목은 지출구조조정이다. 정부가 지출구조조정을 단행한 예산은 24조원에 이른다. 3년 연속으로 매년 23조~24조원의 예산 지출을 구조조정한 것이다. 이전 정부 때 연간 10조~12조원의 지출구조조정을 했던 것의 두 배에 이른다.
지출구조조정은 관행적, 비효율적인 사업을 축소하는 것으로 모든 부처가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예산을 편성하는 기획재정부는 악역을 도맡는다. 앞선 2년간 강도 높은 지출구조조정을 했던 터라 이번에는 재량 지출 삭감과 함께 경직성 경비까지 축소해야 했다. 정부 부처별로 그야말로 ‘마른 수건 쥐어짜기’였다는 후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 간 협업이 이뤄지는 재정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지출을 줄였다. 여러 부처가 연계된 사업은 패키지로 묶어 동시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단기간에 성과를 내도록 했다고 한다. 예컨대 지역 테마관광 활성화 사업의 경우 항만어촌 관련 사업은 해양수산부가, 현충 시설 건립은 보훈부가, 자전거길 조성은 행정안전부가, 관광상품 개발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동시에 예산을 투입해 사업 기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이렇게 아낀 예산은 노인·장애인·취약 아동 등 지원, 연구개발(R&D) 지원, 필수의료 확충과 지역의료 복원, 국방과 치안·자연재해 대응 등에 주로 투입한다.
정부의 지출구조조정 노력은 국민이 직접 체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현재 국가채무가 얼마나 큰 부담인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올해 말 국가채무는 1195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 나랏빚의 연 이자율을 3% 수준으로 잡으면, 이자로만 매일 1000억원 가까운 예산을 써야 한다. 앞으로 저출생고령화로 국가채무는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국가채무가 함께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데, 재정 운용에 너무 소극적이란 비판도 있다. 이 역시 재정 투입 효과의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 우선이다. 기업이 성장해서 많은 세금을 내고, 국민들의 소득과 자산이 늘어나서 세금을 더 납부하는 방향이라면 적정 수준에서 재정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정부는 이런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재정을 적재적소에 배분하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많다'는 말이 회자한 것은 비효율적으로 재정이 쓰이고, 잘못 배정된 예산이 방치됐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내실 있는 지출구조조정은 지속돼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 가운데 미래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 있다면 건전재정일 테니 말이다.
조영주 세종중부취재본부장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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