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 파리에서 열린 6월 경매에서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의 ‘처음 자른 멜론(The Cut Melon)’이 작가 최고가와 18세기 프랑스 올드 마스터 기록을 경신했다. 가장 위대한 정물화가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그는 역사화, 초상화를 최고로 대우하던 시대, 모두가 외면한 정물화에 몰두한 남다른 인물이다.
17세기 설립된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왕실 미술품 주문을 관장하고 살롱 전시를 주관하는 절대적 권위의 미술 기관이었다. 아카데미는 회화 주제에 따라 장르별 서열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최고 등급은 역사화였고 초상화, 장르화, 풍경화, 정물화가 그 뒤를 이었다. 고대 전쟁 영웅, 기독교 성인이 등장하는 역사화는 인간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덕적 권위를 보여주는 예술을 대표했다.
초상화 역시 인간의 형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한 풍경화나 정물화는 저급한 장식품으로 분류했다. 인간의 지배를 받는 자연을 주제로 하는 이들 작품은 이지적 판단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세속적 그림으로 치부됐다. 당시 모든 화가가 역사 화가로 성공하는 것을 꿈꿨고, 귀족에 버금가는 영예를 누린 왕의 화가 또한 역사 화가였다.
샤르댕 역시 10대 때 당대 역사 화가인 피에르 자크 카제와 노엘 니콜라 쿠아펠의 밑에서 수습생으로 일한 뒤 생 뤼크 아카데미에 진학해 역사화가가 되기 위해 정진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 웅장한 장르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대신 사물에 주목했다. 이내 샤르댕은 역사화를 공부하며 배운 아카데미 표현을 정물화에 적용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나갔다.
신화와 성경 속 인물 대신 과일과 채소, 냄비와 그릇을 탁월하게 묘사한 그의 그림은 당시 화단에서 화제가 됐다. 종전에는 없었던 형식적 구조와 회화적 조화를 갖춘 그의 정물화는 귀족들은 물론 루이 15세의 마음마저 사로잡았고, 높아진 인기에 당시 역사화보다 더 비싼 값에 유럽 전역에서 거래됐다. 1757년 루이 15세는 샤르댕에게 루브르궁의 작업실과 거주공간을 제공하며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3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인기는 더 뜨겁고 작품 가격 또한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2022년 샤르댕의 ‘산딸기 바구니’가 파리 아트큐리알 경매에 출품되자 추정가 1500만 유로(약 223억원)였던 작품이 2440만 유로(약 360억원)에 낙찰됐다. 낙찰자는 뉴욕의 한 미술품 딜러,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이 돌연 거래에 제동을 걸었다. 자국의 귀한 그림이 다른 곳으로 팔리는 것을 막겠다는 루브르의 의지는 합법적 몽니로 이어졌다. 정부에 이 작품의 국보 지정을 요청해 최대 2년 반의 거래 동결을 확보하고 자금 마련에 나선 루브르는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 등 기업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박물관 후원그룹과 크라우드 펀딩까지 동원한 끝에 결국 작품 구입에 성공했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세상에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평가처럼 샤르댕은 평범한 일상 속 비범한 풍경에 주목하고, 고착화된 당대 미술사조에 맞서 새로운 성취를 이뤄냈다. 영원히 탐스러울 그림 속 멜론, 칸탈루프처럼 샤르댕의 예술혼과 정신은 지금도 대중을 사로잡을 만큼 신선하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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